추석 끝나자마자 우유가격 줄인상
낙농 부흥시키려던 고종 꿈 떠올라
美에 특사 보냈지만 日 방해로 좌절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난후, 떨어진 우유를 사기 위해 매장에 갔다.

우유를 판매하던 분은 바코드를 찍으며 “추석 끝나면 올리겠다더니 진짜로 바로 올려 버렸다”며 푸념조로 말했다. 추석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낙농진흥회가 10월부터 원유 기본가격을 리터당 8.8% 인상했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다른 유제품 가격도 줄줄이 오르지 않던가. 요거트 같은 유제품과 빵을 좋아하는 나로선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밥과 국도 좋아하지만 빵과 우유도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였다. 언제부터 빵과 우유가 우리의 ‘주식’이 됐을까.

조선 말기 서구식 목축업을 이 땅에 들여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고종과 무관 출신의 최경석이 그 장본인들이다.

고종은 조선을 넘보는 청나라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합중국(미국) 같은 서구 열강의 힘이 필요했고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초기에는 미국도 조선에 루셔스 푸트를 특명 전권공사로 보낼 만큼 관심을 가지고 우대를 했다. 다른 나라들은 청나라나 일본 주재 영사에게 조선에 대한 업무를 맡기고 조선에는 전권공사를 따로 두지 않았을 때였다. 고종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 특명 전권공사를 보내준 미국에 고마워하며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를 보냈다.

민영익이 이끄는 보빙사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들이 미국과 유럽을 배우기 위해 꾸렸던 ‘구미시찰단’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처럼 빠른 시간 안에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미국 시찰단을 보냈던 것이다.

특히 민영익은 고종으로부터 성공한 미국의 낙농업을 면밀히 조사해 오라는 명을 받았다. 백성들이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서구의 발전한 농업을 배워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영익의 보빙사에서 미국의 낙농업 조사를 맡은 자가 무관 출신의 최경석이었다. 최경석은 민영익과 함께 보스턴의 밀과 옥수수 농장을 방문했고, 마침 열리고 있던 보스턴박람회장에 가서 선진적인 농기구와 종자를 구매했다.

최경석은 미국에서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 미국 언론으로부터 “조선에서 온 식물학자”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민영익은 미 국무장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전하(고종)가 농업에 관심이 많으시니 기술을 가르쳐줄 농업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고종은 귀국한 최경석의 보고를 받고 기뻐하며 내탕금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가져온 종자를 키울 농무목축시험장을 하사했다. 최경석은 미국에서 타작하는 타할기(打禾器) 같은 선진 농기구와 종자, 가축이 들어오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첫해는 대풍작이었는데 명성황후는 농무목축시험장에서 키운 채소를 한양에 와 있던 외교 사절과 선교사들에게 나눠줬다.

임금의 성총을 받은 최경석은 잠을 줄이며 최선을 다했지만 미국은 끝내 농업기술자를 보내지 않았다. 고종은 전문가가 오면 농업학교를 세워 체계적으로 기술자를 배출해 농업과 목축을 일으킬 꿈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서 얻을 이득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관심과 지원을 거두어버렸다.

최경석 혼자 이리뛰고 저리뛰며 무리를 하다 결국 급사하고야 말았다. 이후 고종은 낙농업의 불씨를 계속 지펴나가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흰 우유를 잔에 따르면서 낙농업을 부흥시키려던 고종의 안타까운 꿈이 떠올랐다.         

 

손정미
역사소설가,역사소설 <그림자황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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