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 판사의공정거래법 산책(10)대규모유통업자의 상품판매대금 지급 지연

최근 들어 공정거래법의 중요성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 대·중소기업 간 상생은 기본적으로 공정거래가 지켜져야 가능하다. 이 법의 목적은 시장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경제력 집중, 부당공동행위, 불공정 거래를 규제해 자유로운 시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어려워 중소기업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중소기업인의 공정거래법 이해를 돕고자 대법원 재판연구관 허승 판사가 쉽게 설명하는 공정거래법 사례 시리즈를 매월 소개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대형유통업자인 대형홈쇼핑은 중소건강으로부터 홍삼젤리를 납품받아 홈쇼핑방송을 통해 판매하기로 했다. 본계약 체결 전 대형홈쇼핑은 중소건강이 홍삼농장과 소송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소건강에 홍삼을 판매한 홍삼농장이 중소건강을 상대로 홍삼 대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었다.

대형홈쇼핑은 법적 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중소건강에 “중소건강의 상품대금채권에 대한 가압류가 있으면 상품대금의 지급을 보류할 수 있다.”는 지급보류약정을 요구했다. 홍삼젤리 판매가 절실했던 중소건강은 대형홈쇼핑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형홈쇼핑은 중소건강으로부터 홍삼젤리를 납품받아 판매한 후 중소건강에 상품대금 1억원을 지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를 안 홍삼농장이 중소건강의 상품대금채권에 대한 가압류신청을 했고, 법원은 가압류 결정을 했다. 대형홈쇼핑은 지급보류약정을 이유로 중소건강에 상품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1년 후 중소건강은 홍삼농장과의 소송에서 승소했고, 그에 따라 홍삼농장의 가압류결정이 취소됐다. 대형홈쇼핑은 가압류결정이 취소되자 중소건강에 상품대금 1억원을 지급했다.

그런데 얼마 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대형홈쇼핑이 대규모유통업법을 위반해 상품대금을 뒤늦게 지급했다며 대형홈쇼핑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판사 : 공정위는 대형홈쇼핑이 지급보류약정을 근거로 중소건강에 상품대금을 1년 후에 지급한 것이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이라고 봤군요.

공정위 : 그렇습니다. 대규모유통업자는 상품대금을 월 판매마감일로부터 40일 이내에 지급해야 하는데, 대형홈쇼핑은 무려 1년 후에 지급했습니다.

대형홈쇼핑 : 법원에서 중소건강에 상품대금을 지급하지 말라는 가압류결정을 했는데, 어떻게 중소건강에 상품대금을 지급할 수 있나요?

공정위 : 법원에 공탁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대형홈쇼핑 : 법원에 공탁을 해도 어차피 중소마트가 그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소건강은 지급보류약정에 동의했습니다.

공정위 : 지급보류약정은 대규모유통업법에 반해 무효입니다. 설사 무효가 아니더라도 대형홈쇼핑이 대규모유통업법을 위반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대형홈쇼핑 :  유효한 지급보류약정에 따라 대금지급을 잠시 보류한 것뿐인데, 저희가 과징금을 내야 한다고요?

 

대규모유통업법의 제정 이유

2000년대부터 이마트, 홈플러스를 비롯한 대규모유통업자가 급격한 성장을 했습니다. 대규모유통업자는 소비자들에게 합리적 가격과 편의성 등 많은 이익을 주었지만, 인근 지역상권을 몰락시키며 소비시장을 장악했죠. 소비시장을 장악한 대규모유통업자는 납품업자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됐고, 소위 갑질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국회는 공정거래법이 대규모유통업자의 갑질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2011년 대규모유통업법을 제정했습니다. 대규모유통업법은 공정거래법상의 거래상 지위 남용보다 강력한 규제를 정하고 있죠.

대규모유통업법상 상품대금 지급의무   

과거부터 상품대금 지연 지급은 대표적인 불공정거래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대규모유통업법이 시행되기 전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율하던 공정위 고시는 ‘정당한 이유 없는’ 상품판매대금의 지급지연을 불공정거래행위로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제정된 대규모유통업법 제8조는 위탁판매를 한 대규모유통업자는 상품의 판매대금을 월 판매마감일로부터 40일 이내(법정지급기한)에 지급해야 한다고 정하면서 아무런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법률 규정만 보면, 대규모유통업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법정지급기한 내에 납품업자에게 상품의 판매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죠. 만약 법정지급기한 내에 상품의 판매대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이나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대규모유통업자는 납품업자에게 연 15.5%의 지연이자까지 추가로 지급해야 하죠.

가압류가 상품대금 지급의무에 미치는 영향

납품업자의 상품대금채권이 가압류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가압류결정문에는 “제3채무자(대형홈쇼핑)는 채무자(중소건강)에게 상품대금을 지급해서는 아니 된다.”는 법원의 명령이 기재돼 있습니다. 대규모유통업자가 가압류명령을 받았음에도 납품업자에게 상품대금을 지급하면 어떻게 될까요? 납품업자(중소건강)가 채권자(홍삼농장)와의 소송에서 승소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채권자(홍삼농장)가 승소하면 대규모유통업자(대형홈쇼핑)는 채권자(홍삼농장)에게 상품대금을 다시 지급해야 합니다. 대규모유통업자는 상품대금을 이중지급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죠.

이 때문에 가압류명령을 받은 대규모유통업자가 면책될 수 있는지 문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가압류가 있었다는 사정만으로는 대규모유통업자가 법정지급기한 도과로 인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가압류명령을 받은 대규모유통업자는 공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가압류명령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유통업법이 정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죠.

지급보류약정이 상품대금 지급의무에 미치는 영향

그렇다면 사안과 같이 가압류가 있으면 대금지급을 보류할 수 있다고 계약서에 기재했다면 어떨까요? 앞서 본 것처럼 대규모유통업법은 법정지급기한 내에 상품의 판매대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을 뿐 그에 대한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급보류약정이 대규모유통업법에 반해 무효는 아닐까요? 대법원은 지급보류약정이 무효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규모유통업자가 그 지위를 이용해 납품업자에게 불리한 계약 조항을 계약에 편입시킬 우려가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단순히 지급보류약정이 체결됐다는 사정만으로 대규모유통업자가 면책이 될 수는 없다고 봤죠. 지급보류약정이 납품업자의 ‘자발적 동의’하에 체결됐다는 사정까지 인정돼야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의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납품업자의 자발적 동의란

대법원은 자발적 동의가 있었는지는 당사자의 거래상 지위, 지급보류약정 등을 통해 납품업자가 얻게 되는 반대급부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사안과 같이 대형홈쇼핑의 일방적인 요구로 지급보류약정이 체결됐다면 자발적 동의가 인정되기는 어렵겠죠. 사안과 유사한 사건에서 대형홈쇼핑은 패소했습니다. 사실 현재까지 납품업자가 지급보류약정을 자발적으로 체결했다고 인정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자발적 동의’의 의미가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지급보류약정이 유효하다면서도 지급보류약정에 근거한 상품대금 지급보류가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이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납품업자의 동의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유통업법의 규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납품업자가 대규모유통업자와 상호 대등한 지위에서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는 대규모유통업법의 취지를 고려하면 대법원 판결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 내용은 필자의 소속기관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허승 부장판사는 현재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 중이며 공정거래법, 세법에 관심을 갖고 있다. 대전변호사회 우수법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쓴 책으로 <사회, 법정에 서다> <오늘의 법정을 열겠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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