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 99세로 별세
젊은시절 소비 지나쳐 빈털터리 신세

‘오마하 현인’ 버핏 만나 투자귀재 등극
버핏·멍거 콤비플레이는 ‘투자 교과서’

멍거가 제안한 블루칩 투자 ‘신의 한수’
시즈캔디·코카콜라 인수 등 성공신화

 

찰리 멍거의 인생은 큰 아들의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됐다. 그때까지 멍거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은 LA의 멋쟁이 변호사였다. 결국 첫 번째 아내 낸시와는 이혼했다. 전처와의 사이에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다. 멍거는 이혼 위자료로 재산의 반을 날렸다. 그런데 이혼하자마자 큰 아들이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멍거는 큰 아들의 병원비로 재산의 나머지 반도 날렸다. 멍거의 큰 아들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멍거는 독신자 아파트에 사는 빈털터리 이혼남이었다. 바닥을 치던 멍거한테 두 번째 아내가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아내의 이름도 낸시였다. 낸시 역시 멍거처럼 이혼녀였다.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다. 두 번째 낸시와 결혼하면서 멍거한텐 순식간에 4명의 아이들이 생겨났다. 가슴에 묻은 큰 아들까지 더하면 5명이었다. 멍거는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찰리 멍거한테 인생의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돈이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머니 메이저로 거듭난 멍거

찰리 T.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 지난 11월 28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찰리 멍거의 자리는 언제나 워런 버핏의 옆이었다. 투자 문외한한텐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사이드킥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멍거 자신도 그런 자폭 농담을 즐겼다. “워런과 하도 오래 지내다 보니 난 그저 밑에 붙어 있는 각주인가 했다.” 1993년 <포브스>가 선정하는 최고의 부자 리스트에 처음 이름을 올렸을 때였다.

솔직히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은 넘사벽인 존재다. 숫자 투성이 재무제표로 가득한 기업 연례 보고서를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는 위인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버핏은 10대 시절부터 돈을 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1달러에 복리 이자 10%가 붙으면 10년 뒤엔 1만달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핏한테 지금 1달러를 쓴다는 건 미래의 1만달러를 날리는 짓이었다. 버핏이 평생 오마하에서 손수 지은 집 한 채에서 살고 있는 이유다. 반면 멍거는 버핏에 비하면 평범한 사람에 가깝다. 젊은 시절엔 소비왕이었다. 두 번째 아내 낸시가 가정의 CFO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파산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은 두 번째 아내의 첫 번째 남편이라고 농담을 했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에서 부자가 되는 법을 묻자 멍거는 이렇게 답했다. “버는 것보다 많이 쓰는 나쁜 버릇부터 고치세요.”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였다. 손 대는 투자마다 성공하는 마이다스의 손인 버핏과 달리 멍거는 한동안 손 대는 투자마다 실패하는 마이너스의 손이었다. 비극에서 일어섰고 실패에서 배우면서 멍거는 버핏의 옆에 설 수 있는 머니 메이저로 거듭났다.

무엇보다 버핏한테 투자는 브릿지 게임과 비슷했다. 버핏은 투자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돈은 투자의 결과물일 뿐이다. 반면 멍거한테 투자의 목적은 분명했다. 돈벌이였다. 돈을 벌어서 8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평범한 우리처럼 말이다. 우리한테 투자는 그저 생존의 수단일 뿐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도전이다. 멍거는 그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투자에 뛰어들었고 결국 99세에 이르러선 3조3670억원에 이르는 부를 쌓았다.

멍거의 ‘삼라만상 투자법’ 관심

찰리 멍거와 워런 버핏이 처음 만난 건 1959년 공통된 지인의 디너 파티에서였다. 당시 멍거는 35세였고 버핏은 29세였다. 멍거와 버핏은 모두 오마하 출신으로 동향 선후배 사이였다. 1959년 당시 두 사람은 모두 친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LA에서 변호사를 하던 멍거가 잠시 고향 오마하로 돌아온 건 멘토였던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버핏의 투자 멘토였던 벤자민 그레이엄이 은퇴해서 LA 베벌리힐즈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버핏은 투자 논의를 할 상대가 필요했지만 그레이엄은 더 이상 투자에 관심이 없었다. 버핏은 벤자민 그레이엄의 대체재가 필요했다. 그때 찰리 멍거가 등장했다.

찰리 T.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
찰리 T.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

 

버핏이 보기에 멍거는 벤자민 그레이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그레이엄처럼 멍거도 팔방미인이다. 멍거는 1년에 인물 전기를 수백권씩 읽는 사람이었다. 반면 버핏은 책이라고는 기업 연례 보고서만 읽는 인물이었다. 버핏도 자신의 기승전투자법에 약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멍거처럼 세상 돌아가는 것들에 관심이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멍거의 투자법은 그야말로 삼라만상 투자법이다. 멍거는 기업 정보 분석뿐만이 아니라 인문, 사회, 자연과학까지 모든 지식 체계를 통합해서 투자한다.

멍거와 버핏의 평생에 걸친 파트너십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시즈캔디와 코카콜라처럼 버핏을 상징하는 유명한 투자처는 사실 멍거가 처음 발견한 기업들이었다. 세상의 흐름과 사람의 동향을 살펴서 기업을 찾아내는 것이 멍거의 역할이었다. 버핏은 해당 기업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멍거가 버핏의 파트너였던 건 아니다. 사실 멍거는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었다. 처음부터 주식 투자로 부를 쌓은 버핏과는 달랐다. 날 때부터 천재였던 버핏은 주가 흐름과 기업 재무제표만으로도 투자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뒤늦게 투자업에 뛰어든 멍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버핏과 비슷한 투자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래서 멍거한테 주식보다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건 부동산 투자였다.

버핏·멍거 누적수익률 380만%

1960년 당시 LA인구는 80만명 수준이었다. 지금 LA 인구는 400만명이다. 하루에 1000명씩 LA 인구가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주택 개발이 호황이었다. 멍거는 상업 전문 변호사로 일하다가 결국 부동산PF에 뛰어들었다. LA 이곳저곳의 주택 단지 개발에 참여했다. 버핏과 멍거는 1959년 처음 만났지만 멍거는 10년 이상 버핏과의 주식 투자보단 독자적 부동산 투자에 몰두했던 셈이다. 버핏은 당시 멍거가 지은 주택 단지들을 멍거빌이라고 부른다. 대신 멍거빌의 부동산PF는 버핏과 멍거한텐 다른 방식으로 도움이 됐다. 멍거의 부동산PF가 성공하면서 LA와 캘리포니아 일대에 투자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이다.

현금부자 된 블루칩

그때까지 버핏의 투자 조합은 대부분 내브래스카 사람들 위주였다. 멍거를 통해 버핏은 서부 부자들의 네트워크를 얻게 됐다. 1968년 결성된 코로나도 투자 모임이 그것이다. 최초 모임은 13명이었다. 지금은 60명까지 늘어났다. 모두가 미국의 거부가 됐다. 버핏과 멍거는 연평균 20% 수익률을 60년째 유지하고 있다. 누적 수익률은 380만%에 달한다. 마라톤을 100미터 달리기 속도로 한 것이다. 정작 진짜 두 사람이 존경받는 이유는 자기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부의 시조새이자 원조맛집인 것이다.

블루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버핏과 멍거 성공의 초석이 된 중요한 회사다. 멍거는 될성부른 회사를 찾아내고 버핏은 회사의 투자가치를 계산하는 콤비플레이도 블루칩부터 시작됐다. 블루칩은 식당이나 상점이 나눠주는 인센티브 쿠폰을 관리하는 회사다. 식당이나 상점은 블루칩에 미리 포인트 대금을 예치한다. 손님이 포인트 모아오면 상품을 사서 보내준다. 손님이 포인트 모으는데는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면 식당은 미리 포인트 대금을 예치해준다. 심지어 어떤 손님은 포인트가 모였는데도 찾아가지 않았다. 덕분에 블루칩은 현금 부자가 됐다.

버핏과 멍거는 블루칩의 풍부한 유동성을 탐냈다. 블루칩을 인수한 버핏과 멍거는 쌓여있는 현금을 활용해서 기업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시즈캔디, 웨스코 파이낸셜, 버펄로 이브닝뉴스, 프리시전스틸이었다. 모두가 버핏와 멍거가 쌓아올린 100년 부의 초석이 된 기업들이다. 시작은 블루칩 투자였다. 그걸 버핏에게 알려준 건 가족과의 외식을 즐기면서 블루칩 쿠폰을 모았던 멍거였다.

시즈캔디는 멍거와 버핏의 콤비 플레이가 완성된 회사였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나쁜 회사를 싼 가격에 사서 좋은 회사로 만드는 투자를 했다. 시즈캔디부터는 좋은 회사를 좋은 가격에 사서 더 좋은 회사로 만드는 투자법으로 전환했다. 1972년 시즈캔디를 인수한 가격은 2500만달러였다. 원래 시즈캔디 창업주 가족이 요구한 가격은 3000만달러였다. 결국 협상이 결렬됐었지만 창업주 가족이 다시 2500만달러에 합의했다. 사실 2500만달러도 비싸게 샀다는 평가였다. 매출과 영업이익을 고려한 장부가의 3배 이상이었다.

비범·평범의 환상조합 입증

버핏과 멍거는 시즈캔디가 온고잉 비즈니스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큰 추가 투자 없이 지속적으로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였다. 시즈캔디 투자는 결국 코카콜라 투자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됐다. 버핏은 말했다. “시즈캔디를 사지 않았다면 우리는 코카콜라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코카콜라에서 거둔 120억 달러의 가치는 시즈캔디에게 공을 돌려야 한다.” 시즈캔디는 현재 버크셔 해서웨이 시가총액의 2%에 불과하지만 상징성은 20% 이상이다. 멍거의 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멍거는 버핏의 각주라며 겸손해했지만 사실 버핏이 보지 못한 걸 멍거가 본 결정적인 투자가 있었다. 코스트코였다. 멍거는 평생 동안 코스트코 투자를 자랑스러워했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멍거와 버핏은 코스트코 투자를 놓고 농담을 했다. 비행기 납치를 당해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멍거는 코스트코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농담했다. 버핏은 그 말을 하도 들어서 지겨우니깐 “나 먼저 쏴”라고 할 거라고 농담했다. 그럴 정도로 멍거는 버핏도 코스트코에 투자하도록 설득했다. 버핏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멍거는 코스트코가 회원제이면서 저가 판매 방식인 점에 주목했다. 연회비를 통해 꾸준한 현금 흐름이 창출되면서도 회원들이 더 자주 소비를 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창고형 소매점이라 저비용 구조였다. 2022년 기준 코스트코의 마진율은 13.5%에 달한다. 아마존의 온오프라인 공략에도 코스트코가 버틸 수 있는 이유다. 코스트코와 같은 소비 트렌드는 오마하에 머물고 있는 현인 버핏보단 LA의 팔방미인 멍거만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멍거 가족의 가장 큰 부는 버크셔 해서웨이와 코스트코로 쌓은 것이다. 멍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멍거가 남긴 재산이 얼마인지 물을 것이다. 그 대답은 이렇다.” 멍거는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남겼다.” 멍거는 평범한 사람도 버핏 같은 천재의 곁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99년 생애를 통해 입증했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