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수배 대상이 되자 미국으로 망명
버핏의 특강 듣고 가치투자에 눈떠
‘꽁초주식’투자로 손대면 남는 장사

월가의 러브콜에도 창업으로 직행
‘초대박’팀버랜드 투자는 신의 한수
혁명가서 ‘자본주의 달인’완벽 변신

리루(왼쪽)와 찰리 멍거
리루(왼쪽)와 찰리 멍거

2023년 11월 28일 화요일이었다. 리 루는 찰리 멍거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그때 리 루는 아시아로 출장을 떠나는 길이었다. 찰리 멍거의 가족들은 멍거가 리 루와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찰리 멍거는 거의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도 리 루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리 루는 20년 전 둘이 처음 만났던 찰리 멍거의 서재를 다시 찾았다. 정확하게 20년 전인 2003년 리 루는 지인의 소개로 찰리 멍거를 처음 만났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찰리 멍거의 서재는 그대로였다. 리 루는 찰리 멍거가 자본주의의 철학을 깨닫고 성불한 승려와 같다고 느꼈다.

찰리 멍거는 자본주의적 인생을 완성했다. 내가 부자가 됐다. 남도 부자로 만들어줬다. 모두가 부자가 됐다. 찰리 멍거가 부자로 만들어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리 루였다.

랜덤하우스 CEO와의 만남

“이 사람만큼 믿기 어려운 인생 이야기를 가진 투자자는 없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리 루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리 루는 사회주의의 밑바닥에서 태어나서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올라선 인물이다. 리 루는 1966년 4월 중국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부유한 집안의 공자가 될 운명이었다. 리 루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리 루의 어머니는 지주의 딸이었다.

리 루가 태어나고 한 달 뒤인 1966년 5월 터진 문화대혁명이 리 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리 루와 같은 자산계급을 말소하는 문화대혁명으로 리 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광산으로 하방당했다가 사망했다. 어머니는 노동수용소에서 죽었다. 갓난아기였던 리 루는 양부모의 손에 맡겨졌다. 그런데 리 루가 10세 때인 1976년 중국 허베이성 탕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진도 7.8의 강진으로 100만명이 사망했다. 그 중엔 리 루의 양부모들도 있었다.

리 루는 사회주의의 밑바닥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올라선 인물이다.
리 루는 사회주의의 밑바닥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올라선 인물이다.

리 루는 결국 할머니 손에 자라나게 됐다. 중국 최초의 여성 교육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른바 신여성이라고 불렸던 지식인이었다. 리 루는 할머니의 교육 덕분에 난징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세상과 자연이 리 루의 모든 걸 빼앗아갔다. 오직 리 루의 지식만큼은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이때 리 루는 공부를 통해 배운 지식이야말로 성공의 열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 루 특유의 세계관인 ‘문명 3.0론’도 지식을 통해 일어선 경험을 바탕으로 집대성됐다. 리 루는 수렵 채집 단계를 문명 1.0, 농업축산업 단계를 문명 2.0으로 본다. 문명 1.0에서 인간은 자연이라는 공급자의 수동적인 수요자일 뿐이다. 문명 2.0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연과 함께 공급자의 일부가 된다.

그렇지만 생산은 여전히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적 변수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 3.0은 인간이 지식을 활용해서 생산요소를 통제할 수 있게 된 시대다. 그래서 문명 3.0 시대엔 지식이 모든 부의 핵심 요소가 된다. 리 루도 바로 그렇게 부자가 됐다.

사실 대학생 시절의 리 루는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전형적인 운동권 학생이었다. 리 루는 난징대학교에서 물리학뿐만 아니라 경제학도 함께 공부했다. 중국 민주주의 인권 운동의 상징이며 반체제 인사인 웨이징성의 영향을 받았다. 웨이징성은 1980년대 덩샤오핑에게 농업, 공업, 과학, 국방의 4대 현대화 운동에 더해서 민주화를 5대 운동으로 수용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덕분에 일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23세 때인 1989년 리 루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주동했다. 문화대혁명으로 부모가 숙청된 대학생이 탈레반화된 사회주의에 반기를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피의 진압을 당하면서 리 루 역시 중국 정부의 우선 수배 대상이 됐다.

결국 리 루는 홍콩과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리 루를 도와줬던 인물이 유명 출판사 랜덤하우스의 전설적인 경영자였고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를 공동설립한 로버트 번스타인이었다. 1990년 1월 리 루는 자신의 민주화 운동 경험을 정리한 책 <태산을 옮기는 법>을 출판했다.

투자로 ‘태산 옮기는 법’ 터득

리 루는 미국에서 진정으로 태산을 옮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투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투쟁이나 이념이 아니라 돈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리 루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한다. 경제학과 법학대학원과 경영대학원을 6년 만에 수료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긴다.

3개의 학위를 동시에 받은 건 리 루가 처음이었다. 분명 리 루는 지식습득에 있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찰리 멍거도 리 루를 천재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리 루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식이라는 도구를 습득하고 있었지 지식을 무엇에 쓸지는 알지 못했다.

그걸 알게 해준 것이 워런 버핏의 특강이었다. 처음에 리 루는 <뷔페와 함께 하는 강의>라는 제목만 보고 공짜 뷔페를 제공해주는 강의라고 오해했다. 워런 버핏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투자의 문외한이었다. 리 루는 버핏의 투자 원칙들을 직강하면서 자신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투자를 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까지 리 루는 투자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 상하이 주식 시장을 좀먹었던 악덕 주식 트레이더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교육의 잔재였을 수도 있다. 주식 시장은 바보들이 더 바보들한테 돈을 빼앗는 먹고 먹히는 구조로 돼 있었다. 워런 버핏의 가치 투자는 달랐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투자법 선택

리 루는 버핏의 투자법을 공부했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투자를 시작했다. 결국 졸업할 때쯤엔 백만 달러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결국 모든 투자자의 첫 걸음은 종잣돈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시작이다. 종잣돈이 있어야 부의 스노우볼 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리 루의 경우엔 백만달러라는 기초 자산을 마련할 때까지 이른바 넷넷 투자를 했다. 현재의 시가총액이 유동자산에서 총부채를 뺀 가치보다 낮은 기업에만 투자하는 것이 넷넷 투자법이다. 전설적인 투자자인 벤자민 그레이엄은 이걸 담배 꽁초 투자법이라고 불렀다. 장기적으로 큰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절대 실패하지 않는 투자법이다. 대신 기업의 재무재표를 부지런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투자는 돈이 돈을 버는 것이다. 넷넷 투자법은 투자를 노동으로 하는 것이다.

리 루가 선택한 담배 꽁초 주식은 뉴욕시의 지역 소규모 케이블 사업체들이었다. 자산 가치보다 주가가 낮게 평가돼 있었다. 지금 망해서 회사 건물과 방송 장비를 팔아버려도 차액이 남는 사업체들이었다. 리 루는 해당 케이블 사업체들을 직접 찾아가봤다. 당연히 경영진리 리 루를 만나줄 리 만무했다. 리 루는 회사 경비원과 얘기를 나눴다. 유명 방송 관계자가 오가는지 혹시나 스타 연예인이 오진 않았는지 같은 정보들도 투자의 단서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투자 노동을 통해 리 루는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13억원 정도의 자본금을 모을 수 있었다.

리 루는 사회주의의 밑바닥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올라선 인물이다.
리 루는 사회주의의 밑바닥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올라선 인물이다.

노동화에서 패션신발 된 팀버랜드

리 루는 3개의 학위와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갖고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었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수행 평가 기록까지 있었다. 취업 시장이 원하는 스펙을 모두 갖춘 상태였다. 월스트리트의 고액 연봉직을 얻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리 루는 취업 시장에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리 루의 선택은 취업 대신 창업이었다. 월가에서 경험을 쌓지 않고 창업으로 직행하는 것은 리스크가 큰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리 루는 더 큰 돈을 벌려면 자기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 루는 1997년 히말라야 캐피탈을 창업했다.

리 루는 창업 1년 만인 1998년 마침내 승부처인 팀버랜드라는 기업을 발견한다. 팀버랜드는 리 루를 성공한 투자자로 만들어준 이른바 대박 주식이었다. 팀버랜드는 1973년 누벅 소재의 노동자 작업화로 시작한 신발 브랜드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은 산과 숲과 도시로 이뤄진 거대한 건설 현장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왔다. 방수가 되면서 튼튼한 팀버랜드는 생필품이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자 노동자의 자식들은 대학생들이 됐다. 노동자의 자녀들은 부모들처럼 팀버랜드를 신고 등교했다. 팀버랜드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다. 팀버랜드가 노동화에서 패션화가 된 순간이었다. 뉴욕의 합합 뮤지션들도 팀버랜드를 즐겨 신기 시작했다. 1990년대는 MTV 뮤직비디오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팀버랜드의 노란 누벅 소재는 화면빨도 잘 받았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 리 루도 팀버랜드 브랜드에 친숙했다.

리 루는 팀버랜드를 <벨류라인>에서 발견했다. 벨류라인은 저평가된 기업을 찾아내서 분석해주는 리서치 전문 업체다. 워런 버핏도 구독자다. 팀버랜드는 당시 시가총액이 3억 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영업 자산은 2억7500만 달러였다. 현금성 자산도 1억 달러였다. 시가총액보다 보유자산가치가 무려 1억 달러 이상 크다는 뜻이었다. 리 루는 팀버랜드의 투하자본수익률을 분석해봤다. 영업이익을 투하자본으로 나눈 수익성 지표다. 팀버랜드의 투자하본수익률은 50%가 넘어갔다. 리 루는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좋아도 너무 좋은 기업이었던 것이다. 시대의 브랜드인데 지표마저 훌륭했다. 그런데 주가는 너무 낮았다.

히말라야 캐피털 자산규모 20조원대

리 루는 팀버랜드가 저평가된 원인이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팀버랜드는 1987년 상장됐다. 10년 동안 외부 자본을 거의 조달하지 않았다. 신발 장인들인 창업자 가족은 자본 시장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리 루는 미국 안에 있는 거의 모든 팀버랜드 매장을 둘러봤다. 핵심 소비자 계층이 확보돼 있었다. 이젠 신발 뿐만 아니라 청바지 같은 어패럴까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게다가 전체 매출 가운데 해외 매출은 27%에 불과했다.

아시아 매출은 10%로 매우 낮았다. 아시아 시장은 리 루의 전문 영역 가운데 하나였다. 리 루는 팀버랜드 주가가 6배 이상 상승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팀버랜드에 거의 올인 투자를 했다. 결과적으로 리 루는 틀렸다. 팀버랜드의 주가는 2년 만에 6배가 아니라 7배 상승했다. 리 루는 팀버랜드로 초대박이 났다.

2023년 3분기 기준 히말라야 캐피탈의 포트폴리오에는 뱅크오프아메라카, 알파벳, 버크셔 해서웨이, 이스트 웨스트 뱅코프, 애플 등 5개 종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금융주와 기술주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팀버랜드는 이젠 포트폴리오에 없다. 리 루에 의해 자본시장에서 발견된 팀버랜드는 주가 상승을 거듭한 끝에 2011년 패션재벌 VF코퍼레이션에 인수됐다. 인수가는 18억 달러였다. VF코퍼레이션은 노스페이스와 슈프림을 보유한 패션 기업이다.

팀버랜드로 주목 받고 있던 리 루를 2003년 처음 만난 찰리 멍거는 리 루에게 9000만달러를 투자했다. 리 루는 멍거가 자신의 돈을 맡긴 유일한 펀드 매니저였다. 리 루는 멍거의 돈을 4배 이상으로 불려줬다. 찰리 멍거의 투자로 리 루의 히말라야 캐피탈은 네임드 사모펀드가 됐다. 2023년 히말라야 캐피털의 운용자산 규모는 188억 달러에 달한다. 첫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그의 혁명 경험보다 자본주의적인 자질에 매료됐다.” 멍거의 눈은 정확했다. 그렇게 리 루는 투자로 태산을 옮기는 데 성공했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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