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히 보이는 종목에 신속히 투자
던킨 도너츠 매입으로 15배 대박

13년간 연평균30%‘경이적 수익률’
마젤란 펀드 맡아 ‘상식투자’고수

주식 사기 전에 2분간 통성 기도
46세에 은퇴한 파이어족의 전설

피터 린치(Peter Lynch)
피터 린치(Peter Lynch)

 

“당신은 지금 이런 주식에 투자하고 있을 겁니다. 유닉스 시스템에 광대역 메탈기어 통신 규약 비동기식 백플레인 장착. 4차 전지와 루나광 에너지를 쓰면서 친환경적. 초미세 공정 반도체이면서 덴마크 극적외선 장비가 투입된 인공지능의 필수 부품.” 피터 린치는 덧붙였다.

“그 유명한 아무개도 투자했고 당신도 알만한 아무개도 이미 산 종목. 지금 모두가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 주식. 나만 못 샀나 후회가 되는 그 주식.” 피터 린치는 말했다. “그런데 나는 던킨도너츠 투자로 10배 수익을 남겼다.”

피터 린치가 어느 강연에서 던진 농담이다. 피터 린치로부터 주식 종목을 잘 고르는 법을 배우려고 찾아왔던 청중들은 처음엔 웃다가 나중엔 현타가 온 표정들이다. 피터 린치는 한사코 조언했다.

“제발 좀 아는 것에 투자해라.” 그런데 대다수 투자자들은 가능한한 모르는 것에 투자하고 싶어한다. 이유는 투자의 목적이 내적으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투자의 목적은 투자 수익이다. 정작 일부 투자자들은 투자의 목적을 시장을 이기는 것에 둔다. 타인보다 우월한 통찰력으로 남들이 모르는 기술을 이해해서 수익을 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상당수 기술주 투자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첨단 기술이나 신규 기술은 일반 투자자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들조차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어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런 기술주 투자에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건 오히려 일부 개인 투자자들이다. 주식 투자자 중에서 자신이 모르고 투자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정작 정말 알고 투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피터 린치는 자신이 잘 아는 것에만 투자했고 13년 동안 연평균 3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 피터 린치는 현재도 4억달러 이상의 개인 자산을 축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피터 린치는 46세에 홀연히 은퇴했다. 파이어족의 전설이 된 것이다.

골프장 캐디 하며 주식정보 귀동냥

피터 린치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수학 교수였다가 금융사의 회계전문가로 이직했지만 피터 린치가 7세 때 뇌암이 발병했다. 결국 피터 린치가 열 살이 됐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피터 린치는 열한 살 때인 1955년부터 동네 골프장을 돌면서 캐디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이 무렵 피터 린치가 캐디로서 라운딩을 도왔던 인물 중 하나가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의 CEO 조지 설리번이었다.

피터 린치는 귀동냥으로 조지 설리번과 그의 골프 친구들이 나누는 시장 정보를 듣고 배웠다. 피델리티는 1946년 설립된 미국 3위의 자산운용사다. 미국 주식 대중화의 선두 주자였다. 투자 부담을 줄여주는 소수점 투자를 처음 도입한 증권사다. 피터 린치는 나중에 피델리티에 입사하게 된다.

워런 버핏은 11세 때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레이 달리오는 고등학생 때 주식 투자에 손을 댔다. 반면 피터 린치는 종잣돈이 없어서 그렇게 일찍 주식 투자를 경험할 수가 없었다. 피터 린치가 처음 주식 투자에 손을 댄 건 보스턴 대학교 2학년 때인 1963년이었다. 피터 린치의 전설적인 투자 행보로 보자면 오히려 늦은 첫발이었다.

피터 린치는 플라잉 타이거 항공사 주식을 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다. 플라잉 타이거 항공사는 미군의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고 있었다. 피터 린치는 항공주가 전쟁 수혜주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피터 린치는 주당 7달러에 플라잉 타이거 주식을 매수해 주당 80달러에 매도했다. 총 1000달러를 투자해서 1만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피터 린치의 첫 번째 10루타 종목이었다.

피터 린치는 야구에 빗대어 주식 투자 수익률을 표현한다. 실제 야구에선 3루타 다음엔 홈런이다. 피터 린치식 투자 야구에선 수익 배율에 따라서 10루타도 가능하다. 피터 린치는 플라잉 타이거 항공사로 10배 수익을 거두면서 10루타를 쳤다. 피터 린치는 ROTC 장교로 1968년 한국에서 근무했다.

마젤란 함대 타고 투자 대서양 횡단

당시 한국엔 주식 시장이랄 게 없었다. 그래서 피터 린치는 메인주에 있는 사탕무 회사인 메인슈가에 투자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한국 서울에서 미국 메인주의 사탕무에 투자한다는 건 잘 아는 것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터 린치가 한국에서 돌아와서 피델리티의 정직원으로 입사한 게 1969년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예비 펀드 매니저였던 피터 린치는 불과 8년 만인 33세에 마젤란 펀드의 펀드 매니저가 된다. 사실 피델리티가 젊은 피터 린치한테 마젤란 펀드를 맡겼던 건 큰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1977년 전후는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미국 주식의 인기가 시들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1960년대의 고고 시대와 1970년대 초반의 니프니피프티 시대가 1974년과 1975년에 걸쳐서 와르르 무너졌다. 특히 손만 대면 오른다던 니프티피프티 광풍 투자의 폭락 사태는 상당수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떠나게 만들었다. 피터 린치가 마젤란호의 키를 잡은 건 이 무렵이었다.

당시 마젤란 펀드는 운용 자금이 600만달러에 불과했다. 피터 린치는 여기에 펀드 매니저가 부재했던 1200만달러 규모의 다른 펀드를 합병했다. 그렇게 투자 대서양을 횡단할 피터 린치의 마젤란 함대를 만들었다.

피터 린치는 주식 투자자들이 어려운 문제를 더 어렵게 풀고 있다고 봤다. 어려운 문제란 결국 어떤 기업 주식을 매수할 것인가였다. 피터 린치는 ‘상식 투자 전략’을 세웠다. 아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쉬운 문제로 재정의한 것이다. 피터 린치는 증권 투자 업계에는 똑똑한 바보들이 넘쳐난다고 봤다. 전문적이지만 집단적이고 그래서 관료적인 집단들이었다.

포트폴리오 확대, 그물망 투자

그래서 쉬운 투자도 어렵게 만들고 맞는 투자도 지체된다고 봤다. 그래서 피터 린치는 마젤란 펀드를 단 한 가지 원칙으로만 운용했다. 저평가된 종목을 발견하면 복잡한 결재 라인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월가 시스템은 특정 종목에 투자하려면 끝도 없는 승인을 거쳐야 하는 관료식 시스템이었다. 피터 린치는 펀드 매니저들이 가능성 있는 모험주에 투자하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봤다.

삼성전자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면 펀드 매니저가 욕을 먹지는 않는다. 반도체 업황을 탓한다. 듣보잡 중견기업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면 그건 펀드 매니저가 독박을 쓴다. 피터 린치는 이런 투자 업계의 약점을 역으로 이용했다.

다들 뻔히 보이는데도 투자하지 않는 상식적 주식들에 유연하고 속도감 있게 투자했다. 피터 린치 투자가 성공한 건 좋은 기업을 골라서만이 아니라 좋은 기업을 고를 수 있는 펀드의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마젤란 펀드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확대됐다. 금융, 자동차, 철강부터 편의점, 음식료, 의류까지 1400개 이상에 달했다. 워런 버핏은 모든 것에 투자하는 투자자는 자신이 무엇에 투자하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었다. 워런 버핏은 언제나 분산 투자보다 집중 투자를 선호한다. 소수의 종목만 포트폴리오에 담고 승부를 거는 것이다.

반면 피터 린치는 사실상 시장에 있는 유망주를 거의 대부분 매수했다. 한때 피터 린치가 사지 않은 주식을 찾아내기라는 유머 퀴즈가 유행할 정도였다. 사실 피터 린치는 단순히 분산 투자만 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전체 펀드 자산의 절반 이상이 100개 종목에 집중돼 있었다. 겉보기엔 종목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중 투자를 했던 것이다. 대신 이렇게 분산 투자를 하면서 그물망을 넓게 펼쳐놓고 어떤 기업이 오르는지 기회를 봤던 셈이다.

이렇게 피터 린치가 사들인 종목들은 던킨도너츠, 타코벨, 헤인스, 포드 등이다. 지금도 인기가 있는 소비재들이다. 공통점은 모두 펀드 매니저인 피터 린치가 직접 써보고 경험해 본 제품들이었다. 피터 린치는 애널리스트 출신으로서 자신의 기업 분석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장부를 분석했다. 직접 본사와 매장을 가보고 판단했다.

유명한 일중독자였던 피터 린치는 매년 500개 이상의 기업을 방문하거나 미팅했다. 한마디로 온몸으로 기업을 느낀 다음 투자를 결정했다. 아는 것에 투자하는 상식 투자와 철저한 기업 분석과 유연한 시스템이 피터 린치 투자의 본질인 것이다.

“설명 못할 주식은 사지 말라”

피터 린치는 13년 동안 30% 가까운 연평균 수익률을 기록했다. 정작 피터 린치가 13년 동안 내내 수익률의 롤러코스터를 탔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피터 린치는 1981년 수익률 마이너스 22.6%를 기록했다. 1984년에도 마이너스 10%였다. 특히 검은 월요일 폭락 사태가 있었던 1987년에는 마이너스 17.6%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3할대 평균 타율을 낼 수 있었던 건 무려 15배 수익을 기록한 던킨도너츠 같은 종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피터 린치는 1983년 82%의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던킨도너츠는 1950년에 창업했다. 커피와 도너츠의 마리아쥬라는 단순한 조합으로 성공했다. 이른 바 ‘단쓴단쓴’이었다. 던킨도너츠가 창업한 매사추세츠주는 피터 린치의 고향이었다. 던킨도너츠는 피터 린치가 어릴 적부터 잘 아는 기업이었던 것이다.

피터 린치는 매일 아침 커피와 도너츠를 들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을 관찰했다. 던킨도너츠가 미국 동부에만 매장이 집중돼 있다는 걸 간파했다. 매장에 직접 방문해 보고 충성도 높은 고객들이 많은지 직접 확인했다.

피터 린치는 주식을 사면서 스스로 왜 사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기업은 사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주식을 사기 전에 2분 정도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한다. 나는 왜 이 주식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이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요건은 무엇인지, 발생가능한 부정적인 요인은 무엇인지, 입 밖에 소리 내서 이야기한다. 보통의 투자자들은 주식을 사기 전이 아니라 사고 나서 기도한다. 지금 산 주식이 대박이 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개인자산 4억달러 축적

피처 린치는 PEG를 주요한 기업 평가 지표로 삼았다. PER은 시가총액을 순이익으로 나눈 것이다. 기업의 주가가 기업의 현재 이익보다 얼마나 높게 평가됐는지 보여준다. 문제는 PER은 추세를 보여주지 못하는 단편적인 정보라는 점이다. 그래서 피터 린치는 기업의 PER을 기업의 성장률로 나눈 PEG를 선호했다. PER에 연평균 증가율을 반영한 수치였다. PEG가 1 이하면 매력적이었다. PEG가 1 이상이면 매력이 떨어졌다.

문제는 PEG를 기준으로 기업을 분석하면 대다수 투자자들한텐 낯선 기업들이 상위권에 랭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터 린치는 해당 기업들이 잘 아는 기업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숫자를 쉽게 믿을 수 없다면 경험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던킨도너츠처럼 말이다.

피터 린치는 46세에 은퇴해서 파이어족이 됐다. 46세는 피터 린치의 아버지가 뇌암으로 세상을 떠난 해였다. 피터 린치는 2000개의 종목 코드는 외우고 있었지만 딸 아이의 생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소문난 일중독자라 하루 24시간을 일했고 일주일이 9일이면 어차피 8일은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이어족이 된 피터 린치는 지금까지 자선사업가이자 피델리티 자산운용의 컨설턴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누적 자산은 4억달러 이상이다. 던킨도너츠는 2024년 현재 비상장이다. 2020년 외식 업체인 인스파이더 브랜즈에 113억 달러에 인수되면서 상장이 폐지됐다. 이제 커피와 도넛으로 10루타를 치는 건 어려워진 셈이다. 그래도 커피와 도넛 투자법이 내 주식 통장의 뱃살을 키워주는 투자의 상식인 건 불변의 진리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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