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떡에 막걸리는 선술집 인기메뉴
친구들과 시국 논하며 먹던 기억 삼삼
사라진 녹두농사, 값싼 빈대떡은 옛말

박찬일 (칼럼니스트)
박찬일 (칼럼니스트)

전, 부침개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반찬, 간식, 술안주는 물론이고 제사에 올리는 주요 제물이다. 고배(잔치나 제사에 높이 쌓는 음식)를 해도 수직의 볼륨을 주기 위해 전을 까는 것이 기본이었다.

궁중음식으로 알려진 신선로도 전을 넣어 기름기와 녹말의 진한 맛을 더하기도 했다. 전은 사회적 담론의 상징이다. 명절과 여성 노동 문제를 거론할 때 전부치기가 자주 입길에 오른다.

전은 낮은 불에 천천히 부쳐야 하므로 보통 거실바닥에 별도로 자리를 만드는데, 이런 환경이 아주 고되다. 디스크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가장 경고하는 자세 중의 하나다. 그래서 전을 부치지 말고 사다 쓰자던가, 나아가 명절 음식 문화의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사실 어렸을 때는 부족한 간식, 식사로 전이 유용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해방 후 미국의 원조식량 덕을 봤는데 그 대표가 밀가루였다. 짜장면집이 급증한 것도 밀가루가 흔해져서 생긴 1950년대 이후의 유행이었다.

어머니는 겨울과 이른 봄에는 김장김치, 여름에는 부추와 호박전을 부쳐서 먹였다. 까만 프라이팬에 묽은 김치전 반죽을 붓고 지지노라면, 그 냄새에 이미 회가 동하고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1970년대라 식용유가 아주 싸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능한 기름을 얇게 바르고도 전을 잘 부치는 게 기술이었다. 요즘 전 유행은 튀김가루를 섞고 기름을 다량으로 부어 바삭바삭하게 부친다. 옛날과는 아주 다른 방식이다.

최근 고려거란전쟁이 드라마로 히트치고 고려시대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고려시대는 조선에 비해 자료가 상당히 적다. 서긍이라는 중국 사신이 1123년에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걸 저술한 책인 <고려도경>이 최근 완역돼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책에 고려인의 식생활에 대한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고려에는 밀이 적어서 중국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있다. 밀가루값이 매우 비싸 성례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라고 쓰고 있다. 한반도는 밀보다는 메밀, 녹두가 더 성했었다. 밀가루국수는 앞서 말한 대로 해방 이전에는 아주 고급 음식이었다. 서긍이 본 것은 주로 수도인 개경의 풍경인데,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는 이미 밀가루 전이 아니라 녹두전이 유명했을 것이다.

6.25전쟁 후에 이북 피난민으로 인해 남한에도 이북식 녹두전이 널리 퍼졌다. 평양이나 황해도식 냉면집은 대다수가 지지미, 또는 막부치라고 하는 녹두전을 곁들이 메뉴로 판다.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돼지기름에 부친 이북식 녹두전은 피난민들의 생계로 시작돼 서울의 명물이 됐다. 서울은 원래 빈대떡집이 많은 걸로 유명했다, <빈대떡신사>라는 가요가 히트하기도 했던.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은 서울 골목 사이 시장 선술집의 최대 인기 메뉴였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위 노래 가사의 일부다. 이젠 옛날 빈대떡은 잘 찾기 어렵고 값도 비싸졌다. 녹두 농사는 거의 짓지 않는다.

농사가 힘들고 손이 많이 가서 농촌 고령화와 함께 생산량도 크게 줄었다. 때문에 녹두는 거의 수입이다.

과거엔 빈대떡이든 전이든 기름을 아껴가며 부쳤다. 요즘 유행은 거의 치킨처럼 기름을 많이 부어 튀기듯 부친다. 광장시장에서 시작된 유행이라고 한다. 두 가지 다른 전을 같이 부치는 반반전이라는 것도 퍼져 나간다. 전, 부침개의 역사와 시대변화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친구들과 싼 술집에서 아껴가며 먹었던 파전 안주, 어머니의 김치전, 직장동료들과 시국을 논하며 먹었던 빈대떡의 기억이 삼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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