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 내지르는 금융의 연금술사
워렌 버핏과 극과극 투자전략 구사
바닥이냐 꼭지냐, 변동 타이밍 집중
파운드화 하락에 올인 ‘초대박 수익’
자금력 내세워 국제정치에 영향력
‘소로스 슈퍼팩’이 美대선 숨은 변수

조지 소로스
조지 소로스

일론 머스크는 지난해 5월 16일 “조지 소로스는 매그니토 같은 사람”이라고 맹비난한 적이 있다. 조지 소로스의 헤지펀드인 소로스펀드가 2023년 1분기에 테슬라 주식을 전량 매도해서였다. 만화 《엑스맨》 속 매그니토처럼 소로스는 동구권 출신이고, 유대인이고, 철을 움직인다는 3가지 점에서 모두 닮았다. 다만 매그니토가 초능력으로 움직이는 게 철이라면 소로스가 움직이는 건 금일 뿐이다.

조지 소로스는 워런 버핏과 함께 세계 3대 투자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정작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극과 극이다. 워런 버핏은 무한 존경의 대상이다. 별명도 오마하의 현인이다. 성인군자 반열에 올랐다. 반면 조지 소로스는 공포나 경멸이나 증오의 대상이다. 별명도 금융의 연금술사다. 연금술이 내포한 의미의 절반은 사기다.

금융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은 조지 소로스가 1987년 직접 쓴 저서 《금융의 연금술》에서 비롯됐다. 연금술은 조지 소로스의 투자전략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투자자이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우량 기업을 찾아내는 가치 투자자다. 땅속에 묻힌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는다. 반면 조지 소로스는 세상과 시장이 무너지는 위기의 전환기에서 투자의 기회를 포착하는 투자자다. 조지 소로스와 워런 버핏 모두 1930년생으로 동갑내기다. 2024년 올해 93세다. 걸어온 길은 극과 극이다.

 

런던→뉴욕행이 인생 전환점

조지 소로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유대인이다. 조지 소로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동구 유럽은 힘과 힘이 충돌해서 기존 구조가 뒤틀리는 단층 지대였다. 유대인인 조지 소로스는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만드는 정치‧경제적 구조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다. 이때 조지 소로스의 아버지 티다바르는 가족의 성을 유태인 성씨인 슈바츠에서 소로스로 바꾼다. 스페인어로 날아오른다는 뜻이었다. 헝가리어로는 후계자라는 뜻이었다.

소로스 가문의 후계자 조지 소로스는 날아오르기 위해 1947년 헝가리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원래 목적지는 모스크바였다. 소련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티다바르는 런던행을 추천한다. 조지 소로스의 아버지 티다바르 소로스는 젊은 시절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믿지 않았다. 이때 런던이냐 모스크바냐의 선택은 조지 소로스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모스크바 대신 런던을 선택한 건 탁월했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았다. 조지 소로스는 런던에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다. 영국인들도, 영국에 사는 유대인들도 아무도 헝가리 난민 조지 소로스를 도와주지 않았다. 주경야독을 하며 겨우 켄시티타운대학교라는 전문대에 입학했지만 그마저도 쫓겨나고 만다. 조지 소로스가 런던정경대학교에서 청강을 했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대학교에서 청강을 했다는 게 퇴학 사유가 돼도 항의 한번 못할 정도로 당시 조지 소로스는 약자였다.

조지 소로스는 런던 금융가에서 차익거래 담당자로 일자리를 구한다. 얼마 못 가서 쫓겨나고 만다. 1956년 27세 때 유럽 투자사인 FM마이어의 뉴욕 월가 사무소에 겨우 일자리를 다시 얻는다.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한 런던에서 다시 뉴욕행을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이 조지 소로스의 인생을 바꿨다.

 

주식시장 오류성·재귀성에 천착

45년 뒤인 1992년 9월 조지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를 철저하게 짓밟는다. 검은 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 조지 소로스는 영국 정부의 외환보유고 270억달러를 털었다. 개인적으로는 10억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소로스 펀드의 투자자들한테는 20억달러의 수익을 돌려줬다.

결국 당시 존 메이저 영국 총리는 실각했다. 영국 파운드화는 유로화의 일부가 되겠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공산전체주의와 런던 자본주의와 뉴욕 자유주의를 압축 경험하면서 조지 소로스는 하나의 규칙이 무너지고 다른 규칙이 생겨나는 순간이 최대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다.

조지 소로스는 시장 참여자의 경우 시장의 일부만 볼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각의 왜곡이 나타난타고 본다. 이게 오류성이다. 게다가 시장 참여자들은 그런 개인적 오판을 주변에 전파한다. 오류에 기반한 오판이 확산되다가 결국 다시 자기 자신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게 재귀성이다.

오류성과 재귀성이라는 2가지 원칙 때문에 시장은 언제나 불합리하게 움직인다. 경기는 버블과 불황을 오간다. 개별 주식은 등락을 반복한다. 그래서 조지 소로스는 오류성과 재귀성이 만들어내는 변동의 타이밍에만 집중했다. 지금이 바닥인지 지금이 꼭지인지를 알아내는데만 집중한 것이다. 투자자로서 조지 소로스는 개별 기업 분석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조지 소로스의 모토는 이랬다. “먼저 투자하고 나중에 조사하라.”

조지 소로스의 타이밍 감각이 빛난 건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를 통해서였다. 플라자 합의로 미국은 달러 가치를 절하시켰다. 덕분에 일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 가치는 폭등했다. 일본 버블의 시작이었다. 사실 달러 가치가 하락은 소로스 말고도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플라자 합의의 목적 자체가 달러 절하였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언제까지 달러 가치가 하락할 것이냐였다. 플라자 합의가 이뤄진 1985년 9월 22일은 일요일이었다. 당연히 9월 23일 월요일장부터 다른 투자자들은 단기 수익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로스는 추가적인 달러 하락과 엔화 상승에 베팅했다. 당시 플라자 합의의 효능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미국이 일본의 팔을 비틀었다고 해서 일본이 자국의 수출 경쟁력을 쉽게 포기할 것이라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풀베팅한 건 소로스뿐이었다. 1985년 연말까지도 조지 소로스만 달러 공매도와 엔화 매수의 포지션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시장 대 소로스의 구도가 됐다. 1985년 12월 4개월 동안 소로스는 2억3000만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소로스가 시장을 이겼다.

이때의 투자 스토리를 쓴 저서가 《금융의 연금술》이었다. 이 책을 보고 찾아온 사람이 스탠리 드라켄밀러였다. 스탠디 드라켄밀러와 조지 소로스는 1989년부터 2000년까지 220억달러 수익을 합작했다. 이때 유명한 영국 파운드 침몰과 태국 바트와 공략을 벌였다.

1992년 9월 파운드화 하락에 공매도를 위해 소로스가 동원한 금액은 100억달러 정도였다. 여기에 언론플레이까지 했다. 조지 소로스한테 자극 받아서 파운드화 하락에 베팅한 글로벌 핫머니는 1100억달러에 달했다. 소로스 펀드의 11배였다. 여기에 레버리지까지 더해지면서 영국 정부에 가해진 압력은 1조달러 수준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440억달러 수준이었다.

 

 

‘유로화로 단일통화’ 실패 확신

조지 소로스는 영국 정부가 파운드화 가치를 지켜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건 분석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였다. 조지 소로스는 런던정경대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투자자보단 철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 열린사회론을 주장한 칼 포퍼의 제자를 자청했다. 칼 포퍼는 헝가리 출신 유학생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칼 포퍼는 마크르스주의나 자본주의 모두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직 개방적인 사회만이 스스로의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1세기의 시점에서 보면 당연한 얘기다. 냉전시대였던 1950년대에는 급진적 사고였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틀렸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버리고 유로화를 쓰려는 영국 정부의 정책 방향이 닫힌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봤다. 당시 영국은 1999년 목표로 독일과 함께 유로화 단일 통화 구축을 주도하고 있었다. 소로스가 보기에 단일 통화는 국가가 스스로의 경제적 오류를 바로잡을 환율이라는 수단을 버리는 방향이었다.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아시아선 ‘헤지펀드의 약탈자’

조지 소로스가 파운드 하락에 인생을 걸 수 있었던 건 도박이 아니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소로스는 주중에는 트레이딩을 하고 주말에는 철학공부를 했다. 철학자가 되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결과적으론 주말 철학공부가 주중 트레이딩의 신념 체제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영국 다음엔 태국이었고 홍콩이었고 결국 한국이었다. 결과적으론 영국에선 대승을 거뒀다. 태국에서도 승리했다. 홍콩에선 패배했다. 한국에선 휴전했다. 1997년 5월 태국 바트화 공격에선 사실 소로스는 서전에선 2번 이상 패했다.

태국 정부는 영국 파운드화 붕괴를 보면서 소로스의 공격에 대비했다. 소로스는 3번째 공격에서 태국 정부를 자멸시켰다. 태국 정부가 경기 위축을 우려해서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낮은 금리는 소로스가 바트화를 공매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줬다. 정치의 오류성이 소로스한텐 타이밍을 제공해줬다.

한국도 정치가 문제였다. 한국 역시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1997년 11월 한국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무렵부터 조지 소로스는 국적 없는 정치가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32조원까지 쌓아올린 소로스펀드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오류성이 시장의 재귀성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고향인 헝가리에서, 거주지인 미국에서, 부를 쌓은 아시아에서 조지 소로스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불렸다. 헝가리에선 성공의 상징이었다. 미국에선 금융의 연금술사였다. 아시아에선 헤지펀드의 약탈자였다. 물론 영국에선 악마 그 자체였다.

 

바이든 지지로 ‘마지막 빅딜’

조지 소로스는 새로운 규칙이 과거의 규칙을 대체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부를 쌓았다. 언제 매수해서 언제까지 보유할지 타이밍을 헤아리는데 모든 능력을 집중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진리에 집착해서 기업 가치를 분석하기보단 인간이 유발하는 오류의 소용돌이에서 기회를 찾았다. 스스로의 실수를 반복하려는 대상에 대해선 상대가 국가여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희생양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짓밟았던 영국이었다.

이번 미국 대선의 숨은 변수도 소로스다. 2024년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는 이미 바이든 현직 대통령과 트럼프 전직 대통령의 양자 대결로 압축됐다. 이렇게 조기에 양당 후보가 압축되면 그때부턴 머니 게임이다. 미국은 슈퍼팩이라고 불리는 공개적인 정치 자금 모금이 합법화된 나라다.

21세기 이후 민주당 대선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슈퍼팩은 소로스 펀드가 만든 것이다. 존 캐리와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과 조 바이든이 모두 소로스 슈퍼팩의 지원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 민주당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이 모두 소로스와 연관돼 있는 것이다.

조지 소로스는 평생 3번 결혼했다. 원래는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2남인 조나단 소로스가 후계자였다. 조나단 소로스는 아버지 조지 소로스와 달리 철저한 분석가였다. 디테일에는 무심한 아버지와는 소로스 펀드 운영에 있어서 마찰이 컸다.

후계자 자리는 결국 3남 알렉산더 소로스한테 돌아갔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알렉산더 소로스는 아버지의 학문적 열정을 물려받았다. UC버클리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철학자인 아버지처럼 역사학자인 아들도 큰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한다.

알렉산더 역시 아버지처럼 민주당 지지자다. 이미 2024년 대선에서 주요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이번 미국 대선은 역대급 금권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양당 후보 모두 비호감이 큰 고령 후보이기 때문이다. 후보의 자체적인 경쟁력이 떨어지면 이미지 메이킹 선거가 된다. 더 큰 선거자금이 든다. 소

로스 민주당 슈퍼팩의 규모는 1억2500만달러 규모다. 바이든은 트럼프한테 대중적 지지율에서 훨씬 밀린다. 소로스 펀드 같은 슈퍼팩 덕분에 선거 자금에선 트럼프를 압도하고 있다. 인기에선 밀려도 돈에선 이기는 것이다. 1930년생인 조지 소로스한테 열두살 연하인 1942년생인 조 바이든을 지지하는 2024년 대선은 어쩌면 생애 마지막 빅딜이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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