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자동직기 등 장기간 품질 조작
랜드크루저·LX500 브랜드 출하 중단

그림자 드리운 대가족주의 기업문화
‘저스트 인 타임’성공신화 한계에 봉착

전기차 트렌드 외면도 품질위기 촉발
품질승리 넘어 혁신승리가 부활 해법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 회장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 회장

“고객의 신뢰를 배신했고 인증제도의 근간을 뒤흔든 엄중한 일이다.”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 회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사토 고지 토요타 사장도 90도 절을 했다. “고객과 구입처와 관계자에게 폐를 끼쳤다.”

지난 1월 29일이었다. 토요타는 지난해 2023년 1100만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4년 연속 세계 신차 판매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무엇보다 토요타와 렉서스 브랜드만으로 2023년 1000만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토요타와 렉서스 브랜드의 파워가 그만큼 강력해졌다는 의미다.

포드나 폭스바겐처럼 토요타도 회사 이름만으로 자동차 브랜드가 팔리는 레벨이 올랐다는 의미였다. 정작 토요타의 회장과 사장은 축사가 아니라 사과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토요타는 2009년 미국 품질 사태 이후 최악의 신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토요타자동직기와 다이하쓰 등 그룹 전반에 걸쳐 품질 부정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만 했다.

 

오너·전문경영인 함께 사죄

토요타자동직기가 생산한 디젤 엔진은 토요타의 대표적인 SUV인 랜드크루저 등 10여개 차종에 적용됐다. 지난 1월 29일 토요타는 토요타자동직기 디젤 엔진이 적용된 모델의 출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랜드크루저뿐만이 아니었다. 토요타의 최고 인기 차종인 렉서스 브랜드의 LX500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지난 1월 29일 토요타자동직기 공장에 대한 현장 검사를 실시했다. 토요타에 대한 행정 처분을 검토하고 있다. 토요타의 자회사인 다이하쓰에서도 장기간에 걸쳐서 품질 부정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89년부터 64개 차종에 대한 품질 시험 과정에서 174건 이상의 부정이 이뤄진 것이다. 비슷한 품질 부정은 역시 토요타의 자회사인 히노자동차에서도 발각됐다.

이건 토요타가 뿌리부터 썩어 있다는 의미였다. 토요타자동직기는 토요타의 뿌리기 때문이다. 지금은 토요타인더스트리즈로 사명을 바꿨지만 토요타자동직기는 토요타 아키오 회장의 증조부인 토요타 사카치가 1926년 설립한 회사다.

토요타라는 기업 집단과 토요타라는 기업 가문은 모두 토요타자동직기에서 시작됐다. 토요타의 창업자는 토요타 기이치로로 알려져 있지만 뿌리는 선대인 토요타 사카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토요타 사카치는 기계에 대한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당시 농가에서 널리 쓰이던 면포 직기를 개량해서 목재 자동 직기를 개발했다. 그때가 23세 때였던 1890년이었다. 발로 밟지 않아도 자동으로 동력을 만들어서 면포를 생산하는 직기였다. 토요타 사카치는 49세 때인 1926년 마침내 상용화한 자동직기를 제조하는 토요타자동직기 제작소를 설립했다. 토요타의 뿌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직기였던 것이다.

토요타 사카치는 자동직기라는 초기 제품뿐만이 아니라 토요타라는 기업의 문화도 만들었다.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토요타 강령이 그것이다. 토요타 강령은 토요타 사카치가 1930년 별세한 뒤 장남인 토요타 기이치로가 아버지의 경영 철학을 정리한 것이다.

토요타 강령의 핵심은 대외적으론 사업보국이다. 사업을 하는 목적은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이념이다. 이렇게 일본과 한국의 산업화 초기 기업들은 상당수가 사업보국을 기업 이념으로 삼았다. 대내적으로 특징적인 것은 가정적인 팀워크를 강조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토요타라는 기업은 토요타라는 가족의 확장이라는 의미였다.

토요타 특유의 대가족주의 기업 문화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저스트 인 타임이라는 토요타의 생산 방식과 전문경영인과 오너경영인이 번갈아가면서 경영을 하는 토요타의 지배 구조가 모두 대가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토요타의 뿌리인 토요타자동직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자 오너 경영인인 토요타 아키오와 전문 경영인인 사토 고지가 함께 사과를 했다. 토요타는 더 크게 번성했지만 본질은 토요타 사카치가 토요타 강령을 만들었던 그때와 같은 회사인 것이다.

그래서 토요타자동직기에서 벌어진 품질 비리는 더 충격적이다. 토요타가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건 토요타 기이치로의 결정이었다. 토요타 기이치로는 동경제대에서 기계 공학을 공부한 공학도였다.

미국 자동차 산업에 맞서서 일본 시장에 특화된 소형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토요타 기이치로는 1933년 토요타자동직기 아래에 자동차 부서를 만들었다. 이때도 뿌리는 토요타자동직기였던 것이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토요타한테도 위기가 닥쳤다. 극심한 전후 인플레이션 탓에 토요타 역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정작 토요타 기이치로는 대가족주의 때문에 선제적 구조조정에 실패했다. 결국 1950년 토요타는 도산 위기에 몰린다. 이때 토요타 기이치로는 토요타자동직기의 CEO였던 이시다 타이조를 토요타 자동차의 CEO로 선임한다.

대신 자신은 2선으로 퇴진한다. 위기와 기회 때마다 오너경영인과 전문경영인이 자리를 바꾸면서 국면을 전환하는 토요타 특유의 경영 방식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 이때도 토요타 자동차의 구원투수는 토요타자동직기였다.

이건 일본 특유의 번두제가 현대 기업 경영에 적용된 경우다. 막부 시대부터 일본 상가들은 오너를 대신해서 상가를 경영하는 번두를 뒀다. 그런데 이시다 타이조는 취임하자마자 독특한 선언을 한다. 토요타 자동차를 정상화시키면 다시 토요타 기이치로에게 경영권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신임 사장이 취임하자마자 경영 악화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전임 사장의 컴백을 약속한 것이다. 토요타의 지배 구조는 여러 모로 일본 특유의 일왕과 총리 혹은 쇼군의 권력 2중 구조와 닮아 있다.

 

기계 넘어 사람까지 자동화

일본은 수백년 막부 시대 동안 일왕과 쇼군이 상징적 권력과 실질적 권력을 나눠 가지는 2중 구조로 유지돼 왔다. 쇼군이 일왕에게 통치권을 돌려준 이른바 대정봉환 이후 2차 대전 패망까지 권력은 천황이라고 불리는 일왕에게 있었다. 패전 이후 일왕은 다시 상징으로 물러났고 대신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총리가 쇼군의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일본 상가 특유의 번두제나 일본 정치 특유의 쇼군제는 모두 2중 지배 구조다. 토요타는 이런 2중 지배 구조를 기업 문화와 지배 구조에 가장 선명하게 이식한 일본 기업이다. 토요타는 어떤 면에선 가장 일본적인 기업인 셈이다.

그 시작은 이시다 타이조였다. 이시다 타이조는 취임하자마자 대정봉환을 선언하면서 토요타의 상징은 토요타 가문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게다가 토요타 기이치로는 비록 회사를 도산 위기에 몰리게 만들었지만 사실 직원 해고를 미루면서 대가족주의를 지키려고 했던 경영자였다. 이렇게 오너와 경영자와 임직원이라는 토요타의 3각 구도가 완성됐다.

문제는 이런 구도 속에서 발전한 토요타 특유의 저스트 인 타임 생산 방식이었다. 토요타 특유의 저스트 인 타임은 필요한 만큼만 필요한 때에 생산하고 조립해서 공장의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포드의 컨베이터 벨트 시스템을 직접 가서 공부하고 일본식으로 업그레이드한 산물이다. 포드가 기계로 저스트 인 타임을 했다면 토요타는 기계에다 사람까지 더해서 저스트 인 타임을 완성했다. 사람과 기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건 공장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사무실에서도 적용됐다. 그 정점인 토요타의 최고경영자들은 토요타라는 거대한 기계가 완벽하게 맞춰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는 정점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토요타의 초기 경영자들은 일터에서 쓰러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창업자인 토요타 기이치로는 대정봉환을 앞두고 승용차 엔진 개발에 몰두하다가 쓰려졌다. 4대 사장이었던 나카가와 후키오 역시 1967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일터에서 별세했다. 출장과 회의와 회식으로 이어진 과로가 원인이었다.

최고경영진부터 이렇게 무리하는 분위기 속에서 완성된 게 저스트 인 타임의 신화였다. 이번 토요타자동직기와 다이하쓰와 히노자동차에서 일어난 품질 조작 비리도 결국 저스트 인 타임의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토요타 특유의 대가족주의는 상명하복 문화로 이어졌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다보니 결국 품질을 조직해서라도 회사가 요구하는 수치를 맞춰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요타의 저스트 인 타임은 완전한 자동화를 뜻한다. 사람까지 자동화하는 것이다. 결국 그 속도를 저스트 인 타임 안에 따라가지 못한 사람은 뒤처지거나 조작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과로로 쓰러질 수도 있다.

 

무너진 고객신뢰 회복이 관건

2009년 토요타는 1500억 엔의 적자를 냈다. 토요타가 적자를 낸 건 1950년 이후 60년 만이었다. 이때 11대 사장으로 토요타 아키오가 등장했다. 토요타 아키오의 등장은 토요타를 오너 기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반 투자자들한텐 낯선 풍경처럼 보였다. 토요타는 198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유지돼 왔기 때문이다.

토요타 아키오는 토요타 창업주 토요타 기이치로의 장손이다. 토요타 가문의 가주이자 토요타자동직기의 창업주인 토요타 사카치의 증장손이다. 2009년 토요타는 대규모 적자와 미국에서의 품질 논란으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때 토요타는 대정봉환으로 지배 구조를 전환하면서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토요타 아키오는 눈물의 사과로 미국 여론을 달랬다. 대규모 적자 역시 품질 개선과 공정 개선으로 해결했다. 성공적인 대정봉환이었다.

그렇지만 토요타 아키오는 대정봉환 10년 동안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전기차 전환을 한사코 외면한 것이다. 모리조라는 이름으로 레이싱을 즐기는 내연 기관 마니아인 토요타 아키오는 하이브리드에 집착했다. 토요타 특유의 대가족주의도 원인이었다. 급격한 전기차 전환은 토요타에도 구조 조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토요타 아키오는 미국 테슬라와 중국 비야디가 주도하는 전기차 트렌드에도 버티고 버텼다. 정작 토요타가 4년 연속 최다 판매를 기록했던 건 품질과 서비스의 승리였다. 기술적 혁신의 승리는 아니었다. 전기차의 가격이 아직 높고 품질이 아직 미성숙한 탓이었다.

그런데 토요타를 떠받치던 품질과 기술에 대한 신뢰가 이번 토요타자동직기 사태로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다. 토요타의 부활은 거짓에 기반했던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토요타 생산 방식 역시 상당한 무리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토요타의 뿌리인 토요타자동직기부터 자회사들까지 상당한 무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토요타는 혁신이 아니라 품질로 글로벌 1위로 복귀할 수 있었다. 품질의 뿌리가 썩었다면 토요타의 뿌리가 썩은 것이다. 이번 사건이 2009년 미국발 품질 위기에 비견되는 이유다.

토요타는 이미 2023년 대정봉환을 끝내고 다시 번두제로 돌아간 상태다. 품질 경쟁에서 기술 경쟁으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에서 뿌리가 흔들린 것이다. 그래서 토요타 아키오 회장과 사토 고지 사장은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사과부터 했다. 오너와 번두가 함께 고개를 숙인 것이다. 토요타 웨이의 위기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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