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신경계 뺨치는 전 세계 사내 네크워크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도곡동 한국IBM 본사는 내근자들로 붐볐다. 내부에 마련된 모바일 오피스는 서로 전혀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뒤섞여 있었다. 저마다 씽크패드 노트북과 각종 스마트 기기를 갖고 업무를 봤다. 변동좌석제라 입구에 설치된 키오스크 스크린을 통해 등록만 하면 누구나 빈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키오스크엔 도곡동 본사뿐만 아니라 여의도 사옥의 모바일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목록까지 훤히 나타났다. 내선번호만 누르면 곧장 그 자리로 연결됐다. 얼마 전 태풍 탓에 전사적으로 재택 근무 조치가 내려졌던 터라 이날도 다음날 출근 여부가 한국IBM 직원들의 관심사긴 했다. 정작 출근이든 재택이든 일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에 있으나 사무실에 있으나 한국IBM 직원들한텐 아무 곳이나 일터가 된 지 오래였다. 그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이젠 한국IBM에 처음 입사하는 직원들은 누구나 스마트워크 문화부터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사무실에 자리가 없는 건 당연하다. 근퇴도 자유롭다. 세임타임 같은 IBM 전용 사내 메신저 이용법을 익히는 건 필수다. 세임타임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IBM 직원 모두와 연결돼 있다. 세임타임을 얼마나 잘 쓰느냐가 업무 성과에도 영향을 줄 정도다. 대신 맡은 일엔 정확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IBM에서 일하려면 IBM이 일하는 방식에 맞춰서 스마트해져야 한단 뜻이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자 조직과 사람까지 바뀌었다.
IBM은 거대한 글로벌 회사다. 회사의 역사가 100년도 넘는다. IBM은 한때 미국 기술 혁신의 상징이었다. 지금 애플의 선배 격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IBM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초우량 기업이었다. 그러나 IBM조차 성공의 함정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창업자인 토마스 왓슨이 주도했던 혁신의 시기가 지나가자 IBM은 오랜 성공 탓에 오만해져버린 덩치만 큰 대기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IBM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IT 혁신을 흐름을 전혀 쫓아가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글로벌로 분산된 IBM의 의사 결정 구조였다. IBM은 초기 다국적 기업 가운데 하나다. 전 세계에 걸쳐서 사업을 벌이는 통에 조직 문화도 제각각이고 정보와 지식도 제대로 교류가 되질 않았다. 1990년대 초반 IBM은 수십억 달러의 적자를 냈다.
루 거스너 회장은 IBM 80년 역사상 첫 번째 외부인 CEO였다. 거스너 회장은 IBM은 과감하게 뜯어고쳤다. 하드웨어 제조사에서 e-비즈니스 서비스 기술 회사로 변신시켰다. 핵심 전략은 조직 문화 개선이었다. 거스너 회장은 IBM을 살릴 수 있는 잠재 지식은 이미 IBM 안에 다 있다고 봤다. 단지 조직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서 하나로 통합되질 않고 있을 뿐이었다. 1990년대부터 도입된 스마트워크는 그렇게 흩어진 기업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방편으로 연구되고 추진됐다. 리포지셔닝, 리엔지니어링, 리바이탈라이징이 목표였다.
IBM 직원들은 필요한 업무 관련 정보가 있으면 캣테일이나 위키 같은 사내 정보망에 질문이나 의문 사항을 올려놓는다. 곧 전 세계 IBM 직원들의 댓글이 달린다. 간단한 조언부터 시작해서 IBM 안에서 누가 그 분야의 전문가인지부터 해당 직원과 접촉하려면 어떤 사내 인맥을 거치면 빠를지까지 단번에 다 알 수가 있다. 한국IBM 직원들도 큰 도움을 얻고 있다. 전 세계 IBM 직원들의 지식과 두뇌를 스마트하게 결합시킨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IBM과 같은 서비스 회사가 되자”고 선언했다. 사장급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개조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 모델은 바로 IBM이다. 삼성전자와 IBM은 영위하는 사업 영역이 다르다. 삼성전자가 주목하고 있는 건 IBM의 시장이 아니라 IBM이 일하는 방식이다. IBM은 스마트워크를 통해 직원 개개인의 암묵지와 형식지까지 끄집어내서 조직 전체와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전 세계 IBM 직원들이 하나의 두뇌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역시 IBM 같은 빅블루가 되고자 한다.
IBM은 서비스 회사로 변신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연하면서도 통합된 조직으로 혁신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고객들에게 필요한 서비스 솔루션을 즉각 제공하기 위해 체질부터 바꿨단 얘기다. 한국IBM이 1995년부터 스마트워크를 실시한 건 우연이 아니다. 글로벌 IBM이 체질을 바꾸다보니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게 됐고 갖가지 사내 인프라망과 메신저망을 깔게 됐다.
IBM한테 스마트워크는 수단이 아니라 결과였단 얘기다. 다른 기업들은 스마트워크를 도입해서 조직을 유연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IBM은 서비스 기업으로서 유연해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강구하다보니 그게 스마트워크였던 셈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건 IBM의 변신이 아니다. IBM의 혁신이다.

-글 : 신기주(경영전문칼럼니스트  「사라진 실패」 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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