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실형 ‘암초’에 망망대해 ‘표류’위기
선장이 없다. 부선장도 없다. 후임자도 없다. 일등항해사만 있다. 저쪽에선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빤히 안다. 잘 피해지지가 않는다. 선장이 자리에 없다고 일등항해사가 선장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 SK호에서 펼쳐질지도 모르는 풍경이다.
지난달 27일 SK호는 선장을 잃었다. 부선장도 잃었다. 대법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부회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최태원 회장은 징역 4년형이 확정됐다. 최재원 부회장은 징역 3년6개월형을 받았다. 별다른 특별 사면 조치가 없는 한 회장과 부회장이 모두 2016년에나 출소한다.
옥중 경영도 가능은 하다. 옥중 경영으로 버티기엔 3년은 너무 길다. 게다가 재판부 판결엔 숨은 뜻도 있다. 회장과 부회장이 동시에 구속되면 SK그룹의 오너 사령탑은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다. 재판부도 모르지 않는다. SK그룹은 재계 3위의 대기업 집단이다.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서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회장과 부회장은 동시에 구속시켜버렸다. 사실상 대법원 판결을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가 SK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는 걸 요구하고 있단 얘기다.
실제로 지난 4일 최태원 회장은 SK그룹에서 맡고 있던 모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최태원 회장은 조만간 SK그룹 회장직에서도 물러나는 걸로 알려졌다. 그룹 회장직은 법적 지위가 아니다. 상징적이어서 더 막강한 권좌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겠단 뜻이다. 최태원 회장은 최종현 선대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하면서 1998년 SK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불과 서른 여덟 살 때였다. 16년만이다.
그렇다고 최태원 체제가 끝난 거냐면 그건 또 아니다. 선장은 없는데 자리는 있고 그 자리를 채울 후임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SK그룹은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기업한테 리더십의 왜곡과 공백은 치명적이다. 실제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송사에 휘말린 지난 1년 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SK네트웍스는 대규모 손실을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은 적자 전환됐다. SK건설은 적자가 누적됐다. SK텔레콤의 실적은 견조했지만 뚜렷한 성장 모멘텀도 없다. SK하이닉스 정도가 체면치레를 했다.
무엇보다 SK그룹은 최고 리더십 의존도가 매우 큰 기업이다. 삼성그룹이나 현대차그룹처럼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나 현대차에서 함께 성장한 기술 임원들이 그룹 전반에 대거 포진한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공과 한국통신의 인수합병이 그룹 성장의 결정적 계기였다. 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SK그룹은 하루 빨리 새로운 리더십을 세워야 한단 얘기다. 
문제는, 포스트 최태원 체제다. 일단 오너 일가에서도 마땅한 인물이 없다. 최태원 회장의 여동생인 최기원 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이 있다. 주축 계열사인 SK C&C의 2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경영 훈육을 받은 적이 없다. 최태원 회장의 부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의 관장은 소유 지분이 거의 없다. 경영에 간여할 입장도 못된다. 장녀인 최윤정 씨는 이제 스물 다섯 살이다. 장남인 최인근 씨는 아직 열 아홉 살이다.
최신원 SKC 회장이란 대안도 있다. 최신원 회장의 아버지는 최종건 SK그룹 창업주다. 적통인 셈이다. 최태원 회장이 SK그룹을 이끌 수 있었던 건 최신원 SKC회장의 친형인 최윤원 SK케미컬 회장 덕분이었다. 1998년 최종현 회장이 세상을 뜨자 자연스럽게 최윤원 회장이 사촌 서열상 가문의 좌장이 됐다. 자칫 최종건 가계와 최종현 가계 사이에 분란이 일으날 수도 있었다. 최윤원 회장이 자신이 물러서고 오히려 최태원 회장을 앞장서서 지지해줬다. 덕분에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던 최태원 회장이 큰 분란 없이 SK그룹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가문과 SK그룹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번엔 이런 대승적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다. 얽힌 문제들 탓이다. 풀어줄 사람도 없다. 최윤원 회장은 이미 고인이 됐다.
결국 일단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물러난 등기이사 자리를 채우지 않기로 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라는 집단 의사 결정 기구에서 그룹 차원의 경영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기형적이다. 선장은 없는데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이사회 중심 경영은 이사회만 구성한다고 작동되지 않는다. 전문경영인과 이사회를 통해 운영해온 경험과 문화가 겸비돼 있어야 한다. 당장 리더십 체제를 전환한다고 해서 바로 경영이 이뤄지는게 아니다.
자칫하면 SK호는 앞으로 3년을 선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공해상을 떠돌 수도 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란 일등항해사가 갑판장과 기관장과 조리장들을 한데 모으는 자리쯤 된다. 이런 자리에선 다들 배가 어디고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다. 선장이 배가 어디로 가기를 원할까를 고민한다. 쉽게 길이 보이기 어렵다. 그러다 기업이 실패하고 그걸 또 선장을 모셔올 명분으로 삼는다면 더 최악이다. 재계3위 SK그룹한텐 지금 당장 진짜 새 선장이 필요하다.

-글 : 신기주(경영전문칼럼니스트 / 「사라진 실패」 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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