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20년은 수십만 명 연습생들의 수십만 번째 실패로 완성됐다. 역설적이게도 연습생들의 잦은 실패가 K-팝 성공의 숨은 본질이다. 사진은 뉴진스.
K-팝의 20년은 수십만 명 연습생들의 수십만 번째 실패로 완성됐다. 역설적이게도 연습생들의 잦은 실패가 K-팝 성공의 숨은 본질이다. 사진은 뉴진스.

SM엔터테인먼트 설립자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가 ‘CT(Culture Technology)’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천명한 건 대략 2010년 무렵이다. 2011년 6월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이 총출동한 SM타운 파리 현지 공연 뒤풀이 행사에서 이수만은 CT 이론을 설파했다. “CT가 한류의 원천기술입니다.” 그는 IT가 지배하는 2000년대를 종지부 찍고 새로운 기술혁명이 바로 연예 산업에서 촉발될 거라고 자신했다.

사실 이수만은 1995년 SM을 설립할 때부터 CT 이론을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연예 산업은 대중에게 오락과 여흥을 제공하는 단순 문화상품이나 서비스에 불과했다. 연예기획사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스타를 키우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운 좋게 불세출의 스타와 인연이 되면 대박이 났다. 개인의 타고난 스타성에 의존하는 비즈니스였다. 이건 거의 운명학에 가깝다.

이수만도 처음엔 경영학적 측면에서 완성된 CT 경영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열공 모드에 들어갔다. 학술회의를 열 정도로 치열했다. 2000년대 중반엔 하버드 MBA 학생을 대상으로 CT 특강도 수차례 나섰다. CT 이론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추구한 것이다.

결국 CT의 가능성은 논문이 아닌 무대 위에서 입증됐다. SM 소속 아티스트들이 한국, 일본, 아시아, 글로벌 시장을 단계적으로 밟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CT는 SM이라는 개별기업의 성공 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뒤를 이어 YG, JYP 등 대부분의 연예기획사가 CT가 제시한 전략을 저마다의 색깔로 구현했다. 연예 산업이 K-팝이 됐다. CT가 K-팝의 표준화 모델이 된 것이다.

CT는 유독 경영학 가운데 생산관리 분야에 특화됐다. 연예 산업을 제조업처럼 튜닝했다. 공정혁신과 제품혁신 그리고 비용절감 등의 경영학 이론들이 연예 산업에 본격 장착됐다. 음악이야말로 연예 산업의 핵심 제품이다. 공정혁신은 신곡 제작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작곡가들의 참여로 시작된다. 마치 애플이 애플 스토어를 열고, 글로벌 개발자들을 집합시키듯 말이다. 제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 같았다.

또한 연습생 시스템이나 글로벌 오디션 역시 공정혁신의 대표적인 예다. 확률게임에선 선택의 기회가 많아야 이긴다.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애초에 연예 산업은 ‘모 아니면 도’였다. 철저한 시장조사를 해도 기획, 제작, 유통, 마케팅이 완벽해도 성공을 보증할 수는 없다. 갓 데뷔한 아이돌이 대중에게 외면을 받으면 막대한 투자 비용과 노력들이 일시에 날아간다. 회사마다 전 세계에서 입도선매한 수많은 연습생을 훈련시키는 건 하이 리스크(high risk)를 최소화하는 기본 전략이다.

제품혁신은 후크송으로 대변된다. 반복적인 후렴구는 작곡가가 최종 완성한 곡이라고 도장을 찍어도 제품 출시 전에 반드시 후제작을 거친다. 화룡정점으로 제품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이건 창작보다 제조에 방점을 찍는 발상이다.

CT 이론도 한계는 있다. 그걸 보완한 게 요즘의 멀티 레이블 시스템이다. 뉴진스는 하이브의 독립 레이블 어도어의 소속이다. 멀티 레이블은 조직관리 분야의 사업별 조직 환경과 매우 밀접하다.

경역학에서 조직관리는 크게 기업의 조직 운영을 기능별 조직이냐, 사업별 조직이냐로 구분할 수 있다. 그간 대형 연예기획사는 기능별 조직 중심이었다. 위계 계층의 피라미드 구조로 상하 관계에 기반을 뒀다. 이수만과 SM 경영진의 경영권 분쟁 이슈도 이러한 강력한 1인 권능 체제 때문에 불거졌다.

반면 사업별 조직은 분권형 조직이다. 사업에 대한 전문성을 사업부별로 갖게 된다. 뉴진스는 통합된 하이브 그룹의 몇 번째 아이돌이 아니라, 어도어의 첫 번째 아이돌이다. 또 다른 걸그룹은 얼마든지 독립된 새로운 레이블의 설립과 함께 탄생할 수 있다. 기획된 사업 아이템을 위해 아이돌 연습생을 걸러내는 게 아니라, 연습생의 개개인성을 최대화할 팀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업의 조직경영론이나 CT 전략이 연예 산업의 최선책일 순 없다. 모든 전략은 시간이 지나면 고질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온다. 이때 어떤 기업이 새로운 혁신경영을 선도하느냐에 따라 미래 권력을 좌지우지한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역동했던 K-팝 역사의 작동 원리다.

하지만 경영학이 미처 놓치는 게 있다. 바로 사람이다. 연예 산업을 체계적인 경영이론과 치밀한 비즈니스 전략만으로 분석하는 건 오산이다. 경영이론에선 아이돌은 상품·서비스고, 연습량은 R&D 투자이며, 급작스러운 활동 중단은 불량품 재고나 마찬가지다.

끔찍한 이야기다. 우리가 뉴진스를 보면서 제조 공장을 결코 떠올리지 않듯이, 연예 산업은 연습생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다. K-팝의 20년은 수십만 명 연습생들의 수십만 번째 실패로 완성됐다. 역설적이게도 연습생들의 잦은 실패가 K-팝 성공의 숨은 본질이다.

그래서 방시혁이나 민희진은 경영학 측면에선 차가운 K-팝 세상을, 따뜻하고 러블리한 꿈의 도전 무대로 뒤바꾸고 있는 혁신 기업가(entrepreneur)다. 뉴진스는 K-팝의 신경영이다.

이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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