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레고, 만화영화로 회생
마텔도 영화 ‘바비’로 퀀텀점프

‘원소스 멀티유스’가 최고 전략
국내 완구사도 애니 탑재 주력

미국 태생 바비(barbie)는 1959년생으로 올해 64세다. 덴마크에서 태어난 레고(lego)는 1932년생으로 무려 91세다. 사람 나이로 따지면 그렇다. 레고 블록과 바비 인형은 여전히 생존해 있는 최고령 장난감 어르신들이다.

레고 그룹은 지난해 매출 12조1000억원을 기록했고, 바비 제작사인 마텔은 7조1000억원을 달성했다. 숫자들로만 보면 어마어마한 위상을 자랑하지만, 이들 글로벌 완구업체들에겐 공통된 뼈아픈 역사가 있다. 애니메이션 IP(지적재산권)의 힘이 이들 장수기업의 명운을 좌지우지했다는 사실 말이다.

2016년부터 마텔은 디즈니의 라이선스를 경쟁사인 해즈브로에게 6년 동안 빼앗겼다. 그 결과는? 단기간에 CEO가 4번이나 교체됐고, 매출 손실은 5300억원에 달했다. 직원의 30%를 감원하고, 여러 곳의 생산공장을 닫아버렸다. 이게 다 디즈니 공주 인형 때문이다.

올해 영화 <바비>로 새롭게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논 크라이츠 마텔 CEO에게도 영화의 흥행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공주 인형이다. 그는 “디즈니 라이선스는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였다”며 “이것을 얻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완구업체 레고에겐 애니메이션이 생명 연장의 동아줄이었다. 레고는 1998년에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레고는 장난감 생산과 판매에만 몰입하는 완구업의 본질을 제1순위로 여겼다.

그러다 장난감을 아예 만들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건 2004년 무렵이다. 레고는 파산의 문턱에서 서성거렸다. 자칫하면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겨낸 레고였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애니메이션을 두드렸다. 먼저 추억의 만화영화를 소환했다. 바로 <볼트론>이다. 사자 형태의 로봇 5대가 합체해 완성되는 변신로봇의 활약을 그린 애니메이션인데 원작은 일본 ‘백수왕 고라이온’이다. 1984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끈 이력이 있다. 이걸 레고 IP로 재해석했다.

특히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반영된 <레고 닌자고>가 공전의 빅히트를 쳤다. 영국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권에서 일제히 방송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덩달아 레고 장난감 매출도 정상궤도로 올라섰다.

이후 레고는 완구업체를 넘어 애니메이션과 영화 제작사로의 3단 변신을 꾀한다. 2015년부턴 <리부트> <스타워즈> <히어로 팩토리> 등 레고 애니메이션을 TV 방영했고 영화관에선 <레고 무비> <레고 배트맨> 등을 상영했다. 레고의 영화는 큰 호평을 받았다. 이와 함께 해리포터, 스타워즈, 마블 시리즈 등 대작들의 IP와 협업한 제품을 선보였다.

일각에선 글로벌 완구업체의 장수비결을 두고 다양한 미디어 믹스(media mix) 활용에 있다고 분석한다.

미디어 믹스는 IP를 활용해 미디어 산업에서 영화, 만화, 게임, 캐릭터 제품 등 다양한 매체(미디어)로 재창작시키는 마케팅 전략을 말한다. 실제 마텔도 레고도 정말 다양한 IP 영역에서 갖가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완구업계의 슈퍼 IP는 애니메이션 IP이다. 하나의 IP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작하는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 전략에선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공략만한 게 없다.

만화는 스마트 기기에서 최적화하기 쉽지 않고 결국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의 전 단계로 수렴된다. 게임은 특정 마니아 계층에 쏠려 있다. 캐릭터는 주력 상품이라기보단 파생상품에 가깝다. 그나마 영화는 애니메이션만큼의 파워 IP일 수 있다. 문제는 단점이 너무 많다. 제작 일정도 길고, 제작비용도 거대하며 치열한 스크린 경쟁을 치러야 한다.

결국 완구업체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슈퍼 IP를 직접 탑재하거나, 제작사와 연대해야 장수한다. 완구는 애니메이션과 궁합도 잘 맞는다. 눈과 귀로만 즐기던 애니메이션을 손으로 만지고 놀 수 있다는 건, 머릿속 상상을 현실로 만나는 짜릿한 경험과 유사하다. 슈퍼 IP로 무장한 완구의 힘이다.

요즘엔 애니메이션을 방영할 미디어 채널도 많다. 과거처럼 지상파 채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인 OTT나 유튜브에 언제든 홍보할 수 있다. 디즈니와 같은 글로벌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슈퍼 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2021년까지만 해도 매출액 기준으로 완구업체 순위는 오로라월드, 영실업, 손오공, SAMG엔터 순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손오공과 영실업이 각각 3, 4위로 밀려났다. 1, 2위는 오로라월드와 SAMG엔터다.

1996년 설립된 손오공과 1980년에 창립한 영실업도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보유한 IP를 완구로 제작해 유통하는 방식으로 사세를 키워나갔다. 반면 SAMG엔터는 <캐치 피니핑> <미니특공대> <슈퍼다이노> 등을 흥행시킨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다. 2016년에 완구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불과 10년도 안돼 업계 2위로 올라섰다. SAMG엔터의 목표는 한국판 디즈니다.

오로라월드도 국민 후크송인 <아기상어>를 만든 <핑크퐁> 라이선스의 힘으로 완구업계 1위 자리를 더욱 튼튼히 수성하고 있다. 잘 만든 애니메이션 한 편이 수십만 개 장난감을 먹여 살린다. IP의 힘이다.

이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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