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시도였다. 이번에야말로 바비를 영화로 만들어줄 사람을 구해야만 했다. 마텔의 CEO 이논 크라이츠는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와 감독 그리고 배우들을 회사로 초대했다.

마텔이 바비 인형을 탄생시킨 건 1959년이었다. 64년 동안 바비는 마텔의 최고 인기 완구였다. 마텔의 시가 총액은 75억달러 정도다. 이 중 8할은 바비의 몫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바비를 영화화하는건 마텔의 숙원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마텔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 엘세군도로 초대된 할리우드 핵심 관계자들은 으리으리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흥하게 만들었고 <스타워즈> 시리즈를 망하게 만든 유명 제작자 J.J. 에이브람스도 있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제작과 주연인 빈 디젤도 있었다. 인간 바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유명 배우 마고 로비도 있었다. <작은 아씨들>과 <레이디 버드>로 고전을 재해석해서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 천재 여성 감독 그레타 거윅도 있었다.

바비 영화화에 관심을 보인 건 뜻밖에도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 커플이었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은 할리우드 파워 커플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금발 머리 백인 미인의 전형인 바비는 역설적으로 재해석할 여지가 많은 도전적 소재였다. 그레타 거윅보다 노아 바움백이 더 연출에 욕심을 냈을 정도였다. 필요한 건 바비에 대한 완전한 창작의 자율성이었다.

솔직히 마텔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텔의 알파요 오메가인 바비를 야심만만한 할리우드 커플한테 맡긴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마텔 산하엔 마텔 필름이라는 영화사가 있었다.

마텔 필름의 총책임자인 로비 브레너는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신 두 사람의 초기 대본을 보고 “그때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은 즉시 “그럼 안 하겠다”고 거절했다. 평행선이었다. 과거의 마텔이었으면 그렇게 끝날 일이었다. 과거 2번의 영화화 시도가 모두 그런 식으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수차례 물건너 간 영화화

마텔은 2009년에도 유니버설과 바비 영화화 계약을 체결했다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무산됐다. 마텔은 2014년엔 소니 픽쳐스의 계약을 맺었다. 이번엔 꽤 구체적이었다. 주연 배우로 앤 헤서웨이가 캐스팅됐다. 유명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시나리오 작가가 붙었다. 또 무산됐다. 원인은 결국 할리우드와 마텔의 힘겨루기였다. 그렇게 10년을 허송세월했다. 바비의 나이는 어느새 환갑을 넘겨버렸다.

전형적 신체지수 포기, 변신 성공

지난달 전세계 개봉, 1등 싹쓸이

워너브라더스 최고 흥행작 등극

이번엔 달랐다. 이논 크라이츠 CEO가 이끄는 마텔은 그때의 마텔이 아니었다. 이논 크라이츠는 2018년 마텔의 CEO로 선임됐다. 이논 크라이츠는 폭스 키즈 유럽의 CEO로 C레벨 경력을 시작한 이스라엘계 비즈니스맨이다. 폭스 그리고 키즈에서 경력을 시작했단 건 누구보다 할리우드 영상 산업과 아동완구시장의 생리를 잘 아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마텔은 과거처럼 밀당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논 크라이츠가 마텔의 CEO로 선임된 2018년 무렵은 마텔이 수렁에 빠진 시점이었다. 2016년 마텔은 디즈니 공주 캐릭터들의 완구화 라이센스를 라이벌 해즈브로한테 빼앗겼다. 마텔은 바비의 고향이다. 디즈니 공주들도 바비의 친구들이 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를 만드는 해즈브로한테 공주님들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바비 영화화에 관심을 보인 건 뜻밖에도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 커플이었다. 이들은 할리우드 파워 커플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바비 영화화에 관심을 보인 건 뜻밖에도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 커플이었다. 이들은 할리우드 파워 커플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마텔이 받은 타격은 심각했다. 단번에 4억2000만달러에 달하는 매출 손실이 발생했다. 한화로 5300억원에 달했다. 마텔의 CEO는 2년 사이에 4번이나 교체됐다. 아무도 디즈니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디즈니 공주 친구들을 잃은 바비는 외로워졌다. 결국 마텔은 직원의 3분의 1을 정리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2017년엔 해즈브로와의 합병설까지 등장했다. 디즈니를 접수한 해즈브로가 마텔을 집어삼키려고 한 것이다. 바비 월드에 대한 트랜스포머의 역습이었다.

이논 크로이츠는 마텔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비용절감이나 신제품 개발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마텔의 기업 문화를 뿌리째 바꾸는 일이었다. 결국 바비를 21세기에 맞게 재탄생시키는 일이었다. 바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20세기 성(性)역할에 고정된 캐릭터였다. 금발 머리에 쇼핑을 즐기는 가정 주부라는 이미지였다.

마텔, 한방에 분기매출 벌어들여

파생완구효과 땐 천문학적 수익

초대박 발판삼아 IP기업 합류

디즈니가 바비를 버리는 건 그런 구닥다리 이미지 탓도 컸다. 디즈니 자신이 공주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2000년대에 이미 마블과 루카스 필름을 인수하면서 디즈니는 공주 왕국에서 슈퍼 히어로 유니버스로 거듭났다. 2016년 완구 라이센스 파트너를 마텔에서 해즈브로로 바꾼 건 이런 변신의 연장선상이었다.

2019년 마텔은 바비의 전형성에서 벗어난 인형들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바비의 신체 치수는 유명하다. 가슴 둘레는 39.7이다. 허리 둘레는 17.7이다. 엉덩이 둘레는 31.4다. 비현실적이면서도 전형적이었다. 새로운 인형들은 제각각의 체형으로 탄생했다.

2000년 2월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마텔한텐 기회였다. 집에만 갇혀 지내는 아이들한테 부모들이 스마트폰 대신 인형을 쥐어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덕분에 바비 인형 매출은 5억3200만달러까지 늘어났다. 20년 만에 최고 기록이었다. 이건 코로나 팬데믹 덕분이었지만 동시에 마텔의 변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성과였다.

성인 여성인형 ‘첫 등장’

제작 전권을 원하는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벡의 요구를 마텔이 결국 수용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내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영화 〈바비〉의 촬영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가 아니라 영국 런던에서 진행됐다. 마텔 본사와는 지구 반대편 거리에서 촬영이 진행된 것이다. 바비는 마텔의 딸이지만 〈바비〉는 거윅과 바움벡의 자식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바비>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지난 7월 21일 전세계에서 개봉한 <바비>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1등을 차지했다.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흥행 수익만 10억달러가 넘었다.

마텔의 2023년 2분기 매출은 10억8700만달러다. 마텔은 영화 <바비>로 한 분기 매출을 한방에 벌어들인 셈이다. 게다가 <바비>가 만들어낼 파생 완구 판매 효과는 아직 매출에 반영조차 안 된 상태다. <바비>효과로 마텔의 하반기 실적은 더욱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

마텔의 CEO 이논 크로이츠한텐 2개의 미션이 있었다. 하나는 해즈브로한테 빼앗겼던 디즈니 라이센스를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미션은 바비의 영화화였다. 단순한 영화화가 아니었다. 마텔이 단순한 완구 제조사에서 막강한 IP를 가진 아동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거듭나는 시작점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원래가 IP의 천국이다. 애플도 구글도 디즈니도 넷플릭스도 결국 IP 기업들이다. 마텔도 <바비>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

마텔이 창업된 해는 1945년이다. 루스 핸들러와 엘리어트 핸들러 부부 그리고 해롤드 맷슨이 공동 창업했다. 마텔이 바비를 만든 건 창업하고 14년이 지난 1959년이었다. 아내 루스 핸들러의 아이디어였다. 루스 핸들러는 할리우드 영화사인 파라마운트에서 비서로 일했었다. 이때 당대 여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1950년대는 마를린 몬러와 오드리 햅번과 그레이스 켈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시대였다.

지금이야 전형적이지만 1959년 출시 당시엔 바비도 혁신이었다. 그때까지 여자 아이들의 장난감은 아기인형뿐이었다. 여자 아이의 역할을 아이 돌보기로 제한한 것이다. 바비는 처음 등장한 성인여성 인형이었다. 여자 아이들이 되고 싶은 어른의 환상을 반영한 전략이었다. 당시 바비의 마케팅 카피는 이랬다. “나는 너야.”

비바 마젠타는 바비의 부활

그 뒤로 마텔은 꾸준히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영유아 장난감 회사인 피셔스 프라이스를 인수했고 핫휠이라는 자동차 장난감 브랜드를 개발했다. 엘모라는 털 인형도 만들었다. 엘모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1996년 영화 〈솔드아웃〉의 모티브가 된 실화의 주인공이다. 마지막 남은 엘모 인형을 놓고 아빠들끼리 난투극을 벌이는 사태가 정말 벌어졌던 것이다.

여자 어린이의 어른 환상을 겨냥한 바비를 보고 경쟁사 해즈브로가 만든 남자 어른 인형이 지아이조다. 정작 영화화는 해즈브로가 한발 앞섰다.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지아이조>를 먼저 선보인 것도 결국 <트랜스포머>로 초대박을 먼저 낸 것도 해즈브로였다. 해즈브로가 <트랜스포머>로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마텔은 또 한 번 위기에 빠져 있었다.

중국에서 생산된 바비 인형에서 납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만 1100만-개를 리콜해야만 했다. 마텔이 부담한 수거 비용만 1억달러가 넘었다. 마텔이 납바비 사태를 수습하고 신뢰를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비의 영화화가 늦어지고 10년을 허송세월하게 된 건 이런 우여곡절 때문이었다.

결국 2023년 개봉한 영화  <바비>는 1959년 바비가 그랬던 것처럼 초대박을 터뜨렸다. 색채회사 팬톤은 2023년의 칼러로 비바 마젠타를 선정했다. 바비의 칼러다. 바비가 부활했다.

- 신기주 지식정보플랫폼 ‘카운트’(Coun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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