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사관학교로 전락한 혁신 中企
대기업 이직시 보호장치 부재
“혁신 중소기업 모두 고사할 판”
“중대범죄로 다뤄져야”호소도

지난 5월 30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손배소송 행정조사자료 활용 입법 세미나’가 열렸다. 정윤모 중기중앙회 상근부회장(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 더불어민주당 김경만 의원, 장태관 재단법인 경청 이사장 등이 기술탈취 손배소송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30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손배소송 행정조사자료 활용 입법 세미나’가 열렸다. 정윤모 중기중앙회 상근부회장(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 더불어민주당 김경만 의원, 장태관 재단법인 경청 이사장 등이 기술탈취 손배소송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유출하고 탈취하는 방식 중에 최악질은 바로 ‘인력 빼가기’입니다. 사람과 기술을 동시에 빼앗아 갈 수 있는 고전적인 방법인데 너무 노골적이고 유출 흔적이 커서 대기업들이 잘 하지 않았었죠. 그런데 요즘 들어 다시 중소기업의 전문인력을 마구 빼내고 있어요. 이러다 혁신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은 모두 죽어나 갈 판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중소 제조기업 대표의 하소연이다. 사실 대기업의 기술탈취 사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중소기업 기술유출 및 탈취 피해건수는 280건에 이르며, 피해금액은 282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올해 연초부터 대기업 기술탈취 피해를 호소하는 중소기업계의 기자회견과 국회 토론회가 연달아 개최되면서 중소기업 기술보호 관련 제도 개선에 불이 붙고 있다.

구체적으로 △부정경쟁방지법상 형사처벌 규정 신설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행정조사 범위 확대 △범부처 협의체 구성 등과 관련한 입법 보완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대책은 사람이 아닌 기술이 도용되거나 유출되는 위반행위 적발시에 조치할 수 있는 법·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중소기업의 핵심 기술인력이 관련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사례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호장치가 부재한 상황이다.

이는 근로자 개인의 ‘직업의 자유’에 가려진 중소기업계의 또 다른 기술탈취 피해 유형이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도 급여 등 더 좋은 대우를 받아 이직을 한다는 인재를 막을 별다른 대안도 없는 실정이다. 대기업이 사업을 확장하거나 신사업에 본격 진출할 경우 중소기업이 육성한  핵심 인력을 빼 가는 경우 기존 연봉보다 1000만원에서 많게는 2000만원을 올려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앞서 익명을 요구한 중소기업 대표는 “갑자기 핵심인력이 빠져나가면 업무 공백이 생기는 게 아니라 아예 프로젝트가 중단될 수 있는 사업 위기가 터진다”며 “중소기업의 혁신 의지는 무참히 꺾이고 생산성은 뚝 떨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더 큰 문제는 다른 직원들에게도 이탈 조짐이 번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대기업이 연관 업종 생태계의 중소기업과 상생차원에서라도 최소한 인력 스카웃에 있어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는 게 중소기업계의 목소리다. 다른 한편에선 현재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대기업의 아이디어·기술탈취 법·제도 개선 아젠다에 인력 빼가기도 중대범죄로 다뤄져야 한다는 호소도 나온다.

지난 7월 4일 열린 제70회 희망중소기업포럼에서도 ‘중소기업 인력난 해소 방안’ 중에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 문제에 대한 지적이 주된 이슈가 됐다.

이날 주제발표자로 연단에 선 한정화 국민통합위원회 대·중소기업 상생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중소기업의 장기 재직 및 핵심인력 유출 방지를 지원하고 중소기업 근로자의 역량도 강화하는 정부대책이 나와야 한다”며 정책과제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현장 Q&A 시간에 김정회 엠큐브테크놀로지 대표는 한정화 위원장에게 “신입직원을 채용해 일을 가르치고 나면 대기업이 데려가는 경우가 많다”며 “예전엔 대기업이 정시채용으로 신입직원을 한두 차례 채용했는데, 요즘엔 수시채용이라는 명목으로 경력자를 데려간다”고 질의했다. 이에 한정화 위원장은 “핵심 기술인력을 빼가는 문제는 막아야 한다”며 “개인의 이직과 직장 선택의 자유를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핵심 인력유출을 막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는 첨단산업이나 신성장 산업군에서 더욱 심화되는 분위기다. 강력한 기술혁신 경영철학으로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비츠로테크 그룹은 때아닌 대기업의 인력 유출에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다. 이 회사는 전기인프라 사업을 시작으로 우주항공·원전·방산 등 첨단산업까지 도약하고 있는 혁신기술 기반의 강소기업이다.

지난 8월 <중소기업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병언 비츠로테크 대표이사 부회장은 “십년 넘게 핵심기술을 오래 개발해온 고급 인력을 공격적으로 빼가는 상황”이라며 “직원의 이직은 개인의 선택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부 대기업의 무리한 인력 스카웃은 대·중소기업의 상생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게 아닐까 싶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온라인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플랫폼, 자사몰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이 관련 중소기업의 2~5년차 직원을 대거 빨아들이는 일도 가속화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중소 플랫폼 업체의 대표는 “지난해 몇 개월에 걸쳐 5명의 인력이 관련 대기업으로 이직을 했는데, 너무 과도하게 인력유출을 하는 통에 해당 대기업에 내용증명까지 보냈다”고 지적했다. 이 업체는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대비 50% 가까이 줄어들 정도로 인력 빼가기에 따른 생존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애써 투자한 핵심인재를 대기업이 달콤한 고임금으로 마구잡이로 빼가면 투자와 혁신 기술에 사활을 건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인력 사관학교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기업사회에서 인력의 이동은 모두가 겪는 일상적인 관례지만, 혁신기술과 아이디어를 보유한 중소기업이 우수한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양성할 수 있는 정부의 지원과 피해방지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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